전라북도/부안군

부안...고홍건 신도비. 효충사. 반송.

임병기(선과) 2025. 6. 2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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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면 석불산에 있는 평장사 두방 묘역의 고려시대 문석인을 뵈러 가는 길

주차장 초입에 동선에 없었던 신도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홍건 신도비. 1668년(사후 3년 후)

하서면 석불산길 138 (청호리)

전북 문화유산 자료

신도비 뒤편에 아버지 고희와 고흥건 묘와 집안 묘역이 있습니다.

영원군고공신도비명(瀛原君高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자헌대부지중추부사영원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 고공신도비명병서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瀛原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高公神道碑銘竝書)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 경연춘추관사 예문관제학성균관대사성 세자우빈객 조복양(趙復陽)지음

가선대부병조참판 이정영(李正英) 씀 

통정대부행홍문관응교지제교겸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교서관교리한학교수 여성제(呂聖齊) 전서

 

공의 휘는 홍건(弘建)이요, 자는 입부(立夫)며 고씨(高氏)니 그의 선조는 제주에서 나왔다. 적(迪)이라는 분이 고려조에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그 후 대대로 서로 이어 재상이 되었고 증조 세호(世豪)는 도총부경력 증공조참판이요, 조부 사렴(士廉)은 함경남도병마우후증병조판서 제원군이요, 아버님 희(曦)는 호성공신 영성군 증호조판서요, 어머님 부령김씨(扶寧金氏)는 의복(義福)의 따님이라 영성군의 아우 성주판관 증병조참의 현(睍)은 한양조씨 사의필(司議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영성군이 무자하여 공을 사자(嗣子)로 삼았다.

 

공은 경진년 7월 22일 생으로서 어려서부터 기품과 도량이 평범한 아이들과 달라 씩씩하고 활달하였으며 계묘년에 무과 급제하여 계축년에 수문장이 되었고 공신의 적장자로서 6품 벼슬에 올라 임술년에 찬획사군관(贊劃使軍官)이 되어 공로가 있었으므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갑자년 이괄난(李适亂)에 인조대왕을 공주(公州)로 호위해 모신 공이 있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특히 영원군에 봉함을 받았으며 을축년에 희천군수(熙川郡守)로 제수되고 신미년에 여산영장(礪山營將)이 되었는데 사졸들의 신임을 크게 얻었으므로 임기 연한이 찼으나 일 년을 더 있게 되니 그 영의 군사들이 공을 위하여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갑술년에 오위장이 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임금님을 남한산성으로 호위해 모시고 서문협수장(西門 挾守將)이 되었으며 장단(長湍)부사가 결원되어 공으로 장단부사를 삼았는데 얼마 있다가 자청하여 나와서 적과 싸워 공을 세웠음으로 충청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직품을 더하여 가의대부에 올랐다.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시어 공을 불러 이끌어보시며 노고를 위로 하시고 보내니 다시 병영에 이르러 흩어지고 도망친 군사들을 모아서 정성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몸 가지시기를 간결하게 하고 무리 다스리기를 너그럽게 하니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여 떠난 후에 여산에 있었을 때와 같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임오년에 도총부총관을 제수받아 서흥(瑞興)부사가 되어 당시 임공광(任公絖)이 감사가 되었는데 성품이 엄하여 수령들이 책벌을 받는 자 많되 홀로 공에게는 매양장자라 칭하고 비록 약간의 과오가 있더라도 또한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정미년에 영국공신회맹(寧國功臣會盟)에 참여하였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무자년에 도총관으로 되고 신묘년에 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 호남지방 부안(扶安) 구택에 돌아오시어 죽립 속에 초당을 짓고 자재자적 한가히 소일하며 스스로 즐겁게 지내시다가 을미년 8월 28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76세라. 이해 10월에 부안하서(扶安下西) 선영 옆 자좌(子坐) 오향원에 장사지냈는데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예장하였다.

 

공은 몸이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 힘이 강하여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사람됨이 독실하고 너그러우며 천성이 효도가 지극하고 우애가 두터워 집에서 지내거나 관직에 임하여서나 훌륭한 것이 있었다. 전부터 함양박씨는 생원 홍립(弘立)의 따님인데 아들이 없었고 후부인 기계유씨(杞溪俞氏)는 첨지중추부사 제증(悌曾)의 따님으로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일찍 죽어서 족제홍선(族弟弘選)의 아들 두황(斗煌)을 사자(嗣子)로 삼았다. 두황은 사인(士人) 김자약(金自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수일, 재일, 우일(守一 宰 ― 字一)은 모두 어리고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며 측실의 아들 두소(斗熽)는 사인나환(士人羅瓛)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이흔(李焮)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내 젊었을 때 공의 이름을 익히 들어 귀에 익었었는데 두소(斗熽)가 유부인(兪夫人)의 명으로 부안으로부터 한양에 달려와서 묘비문을 지어달라고 간청하기 때문에 마침내 이를 기록하여 이르되 기상이 늠름한 용모와 태도 진실한 자질은 그 성과 능력을 잘 나타냈으며 오직 공훈이 있는 문벌이라서가 아니라 높은 벼슬과 많은 나이로 평안히 지내다가 돌아가셨으니 석불산 언덕에 이미 안정하고 길할 것이로다. 무신년 2월 일 세움(부안 문화원)

귀부(정면)

이수

귀부(측면)

효충사

효충사

효충사(效忠祠)에 배향된 고사렴(高士濂)은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역임하였다. 고희(高曦)[1560~1615]는 고사렴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의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졌다. 고홍건(高弘建)은 고사렴의 손자로 고희에게 양자로 들어갔는데 무과에 급제해 장단 부사에 올랐다. 고두황(高斗煌)은 고홍건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625년(인조 3)에 유림과 자손들이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에 있는 제주 고씨(濟州高氏) 선산 아래 효충사와 영각(影閣)을 건립하고 영성군(瀛城君) 고희를 향사(享祀)하였다. 1820년(순조 20)에 사우와 영각을 중수하였으며, 1977년에는 유림의 건의로 제원군(濟原君) 고사렴, 영원군(瀛原君) 고홍건, 영해군(瀛海君) 고두황 3위를 추배하였다. 본래는 효충재(效忠齋)였으나 종중 유물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재실을 중수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배롱나무. 수령 약 400년

배롱나무

반송

효충사 홍살문 앞쪽

1656년 고희 장군의 아들인 고홍건 장군의  장례식에 왔던 예조 좌랑 이휘진이 묘목을 가지고 와서 영성군 고희 장군 사당과 영당 부근에 기념 식수했던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묘역에는 큰 관심이 없어 통과했지만 고홍건 신도비 뒤편으로 선생과 선대의 신도비와 묘역이 있습니다. 또한 효충사 입구에 고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으나 문이 닫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202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