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부안군

부안...능가산 월명암

임병기(선과) 2020. 3. 1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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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여치에서 출발

오르막 산길 1시간 소요

오전에 내변산 영천사지를 답사한 탓인지 몸이 무겁지만, 이따금 만나는 산행객의 인사를 격려 삼아 좁은 보폭을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쌍선봉, 그곳에서 200여미터, 맑은 댓닢소리, 상사화 군락을 비켜 돌아서니  파릇파릇한 산속 채마밭이 눈에 들어오고, '참 부지런한 스님이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미소가 흐릅니다. 돌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순례객의 인기척에 털복숭이 삽살보살이 반갑게 꼬리치며 마중을 나왔습니다. 중정에 올라 뒤돌아 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같은 풍광에 피로가 저절로 사라지고 카타르시스가 전신을 휘 감습니다.

 

월명암月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691년(신문왕 11) 고승 부설()이 창건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고승 진묵()이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863년(철종 14) 성암()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 것을 1915년에 학명()이 중건하였고, 1956년에는 원경()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의 한 곳으로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지방의 3대 영지()로 손꼽히는 곳이며, 봉래선원()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행암()·용성()·고암()·해안()·소공()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인법당()을 비롯하여 산신각()·운해당()·수각()·요사채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쌍선봉 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는 묘적암()이 있다. 이 중 운해당과 묘적암, 요사채는 최근에 주지 종흥()이 신축 또는 중수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묘적암 위쪽에 있는 2기의 부도()가 주목된다. 사찰측에서는 이부도 중 왼쪽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부설의 사리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부설전()」에는 그가 죽은 뒤에 다비하여 사리를 묘적봉 남쪽 기슭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절의 앞쪽으로는 의상봉()과 가인관음봉() 등의 암봉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고, 법왕봉()에 올라 바라보는 일몰 광경이 빼어나다."(네이버 지식백과)

 

 

 

이매창 시비(부안.매창 공원2012년)

 

등월명암(登月明庵)

 

복축난야의반공 卜築蘭若倚半空

일성청경철창궁 一聲淸磬徹蒼穹

 

객심환야등도솔  客心怳若登兜率

독파황정예적송  讀罷黃庭禮赤松

 

대웅전

 

삼존불

 

칠성도.1962

 

산신도.1962

 

화기 畵記

불기佛紀 2989년 임인壬寅 10월 18일.1962년

 

산신도

 

관음전

 

부설전浮雪傳

불교소설로 월명암에 소장, 관음전 외벽에 그림과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 진덕여왕 즉위 초 왕도(王都) 남내에 진광세(陳光世)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영리하고 비범하였다. 다섯 살에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의 제자가 되어 일곱 살에 이미 법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법명을 부설, 자를 의상(宜祥)이라 하였다.

 

구도생활에 전념한 끝에 능가(楞迦 : 지금의 변산) 법왕봉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영조(靈照)·영희(靈熙) 등과 함께 수도에 힘썼다. 그런 뒤 세 사람은 문수도량인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도중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怨)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법문을 가르쳤다. 주인에게 묘화(妙花)라는 딸이 있었는데, 부설의 설법을 듣고는 죽기를 한하고 그와 평생을 같이 하려 하였다.

 

출가한 몸인 부설로서는 애욕에 미혹될 처지는 아니었으나, 자비 보살의 정신으로 묘화와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되었다. 두 벗은 부설을 남겨두고 오대산으로 떠났다. 세속에 머물러 수도하는 15년 동안 부설은 등운(登雲)·월명(月明) 남매를 두었다. 두 자녀를 부인에게 맡기고 자기를 병부(病夫)라 일컫고는 수도에 전념하여 5년 만에 크게 깨쳤다.

 

옛 벗 영조·영희가 오랜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아왔다. 세 사람은 서로 공부의 성숙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물병 세 개를 달아놓고 각자 하나씩 쳤다. 두 벗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흘러내렸으나 부설의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 공중에 달려 있었다. 속세에 머물러 수도한 부설의 깨달음이 출가수도한 두 벗을 앞질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부설은 선악(仙樂)이 울리는 가운데 입적하였다. 두 자녀도 수도하여 열반하였고, 아내 묘화는 110세를 누렸다. 산문의 석덕(碩德 : 덕이 높은 중)들은 두 자녀의 이름으로 암자를 지었고, 지금까지 등운암과 월명암으로 불려온다.(다음백과)

 

관음전

문화재청 한국의 사찰문화재 총람에는 목조대세지보살좌상으로 표기되어있으나, 관음전에 모셨습니다.

단독으로 조성된 보살상이 아니라 삼존불의 협시보살로 추측되며, 조선후기 느낌입니다.

 

 

 

 

 

 

 

 

 

 

진묵대사(1562~1633) 진영 모사본

 

진묵대사와 월명암 일화

진묵이 월명암에 있을 때였다. 가을이 되어 중들이 동냥을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아 진묵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에 갑자기 초상이 나서 시중들던 시자가 초상집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때 시자가 진묵이 먹을 음식을 준비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여기에 공양을 차려 놓았으니 때가 되면 스님께서 들어다 잡수십시오.”라고 말했다. 진묵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방문을 열어 놓은 채 조용히 앉아 『능엄경(楞嚴經)』을 보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 마을로 내려가서 초상을 치른 시자가 다시 암자로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진묵은 내려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진묵의 손에서 피가 흘러 그대로 말라서 엉겨 붙어 있었다. 시자가 내려갈 때 문지방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 문이 닫히면서 손에 상처가 났어도 아픈 줄 모르고 삼매경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탁자 위에 차려 놓았던 음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자가 절을 하고 문안을 올리자 진묵은 “너는 왜 제사 참례를 안 하고 빨리 왔느냐?” 하고 물었다.

 

완주 봉서사 진묵대사 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675

 

신장도

목조?

 

 

부도전

묘적암 향우측 뒤편

순례객 출입금지 안내문 때문에 조심스럽게 뵈었습니다.

 

 

부도(1)

부설거사 부도라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방형 기단위에, 종형 탑신, 기쭉한 보주를 별석으로 조성 하였습니다.

시대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00 0씨 영주탑(00 0氏 靈珠塔)

독특한 부도 입니다.

치석되지 않은 지대석 위에 상하대좌를 쌓고 길쭉한 탑신과 사모지붕을 올렸습니다.

 

상하대좌. 탑신

상대좌도 탑신 처럼 길쭉한 이색적인 작례입니다.

 

옥개석

 

 

당호

00 0씨 영주탑(00 0氏 靈珠塔)

마모가 심하지만, 밀양 박씨 영주탑(密陽 朴氏 靈珠塔)으로 읽혀 집니다.

스님의 부도가 아니라 재가 신도 부도일까요?

 

 

 

월명암 부도

우리카페 오분향님 소개로 인지하고 순례하였습니다.

폐사지를 비롯하여 답사객들이 잘 찾지 않은 문화재를 공유해주시어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거듭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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