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강화군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임병기(선과) 2024. 8. 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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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문화재청 주관, 답사 이후 첫걸음입니다.

 

뒤죽박죽인 그때 글이 남아 있습니다.

 

"가을이 농익어 가건만 떠나지 못함의 아쉬움에 병이 깊어질 무렵 답사후기 당선 부상으로 강화도로 답사 간다는 문화재청에서 날아온 낭보에 거의 보름밤을 불면에 시달린 것은 우리 문화를 좋아하면서도 한양의 궁궐을 비롯 경기북부를 답사해보지 못한 나의 컴프렉스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녀지에 대한 기대는 첫날밤 마누라 가슴을 더듬던 기억 만큼이나 흥분과 감흥으로 가득 차서 오매불망 잠 못 이루며 천재일우의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기에 새벽 5시부터 대구에서 출발한 여정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강화대교 건너 강화초입에 도착했어도 피로는 고사하고, 점심 식사 때 맛본 게장과 강화특산 순무 깍두기 맛에 힘이 솟아나더라.

 

강화도!

청동기 시대의 거석문화,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성지, 고려 무인정권 시절의 천도, 민족문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팔만대장경의 산실, 근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수도 한양의 관문이며 전초기지, 오늘날도 분단의 민족사의 현장이기에, 좌충우돌, 동분서주하며 마냥 휘젓던 여느 답사와는 달리 옷깃을 여미며 박물관을 들어섰다.

 

박물관 입구에 나열된 50여 기의 비석림의 선두에 세계최초로 금속활자인 상정고금예문을 만든 곳을 기념하여 책을 펼친 모습의 금속활자 중흥 발상 기념비가 서 있으며 하마비 뒤로는 강화 유수의 선정비가 무수히(?) 자리잡고 있다. 제기랄! 모두가 고을 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면 탐관오리는 누구였으며 강화에는 세세년년 요순시절이 이어졌다는 말인가? 차라리 이 자리에 선정비를 남기지 않은 강화유수가 진정한 선정으로 보살핀 고을원님에 분명하리라...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기분 좋은 금표비에는 "방생축자장일백(放牲畜者杖壹百) 기회자장 팔십(棄灰者 杖八什)" 즉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백대를 치며,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팔십 대를 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금표비는 1703년에 세워진 오늘날 자연보호헌장비인 것이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초등 저학년생들의 박물관 견학 행렬이 눈에 들어와 상당한 정성과 노력이 돋보이는 전시장을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았으나 제1 전시실은 참성단, 강화 지석묘와 더불어 선사시대의 유물이, 2 전시장은 팔만대장경, 상감청자와 더불어 음통이, 당좌, 비천상이 없으며 특이하게 중앙에 2줄이 양각된 중국 종을 닮은 고려 숙종조의 동종이, 3,4 전시실은 강화의 고려, 조선 및 근대 전쟁사 관련 자료와 각종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군사조직의 최전선 초소인 갑곶돈대로 향하는 목에 성벽 아래에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심었다는 탱자나무가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 탱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돈대에는 최장거리 700M의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포는 인명살상용이 아니라 배에 구멍을 내는 정도라고 하니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이곳 돈대로 침입하였을 때 그 역할이 지극히 미미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돈대의 여장을 따라 내려가니 몽고와의 협약에서 우리에게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며 세운 이 섭정이라는 팔각정자가 복원되어 있었으며, 여장에는 1개의 근총안과 2개의 원총안이 하나의 '타'를 형성하였으며, 성곽의 치성을 닮은 여러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기 용이한 '치'도 여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시절 첨단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 미국군인을 맨손이나 다름없는 우리 군사가 어찌 당할 수 있었겠냐마는 조선 군사는 용감하게 맞서 대항했으니,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공과를 떠나 우리 역사에 세계열강과 싸운 적이 이때 말고 언제 또 있었단 말인가? 아니, 오늘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대외교, 굴복외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것이 유쾌한 까닭은 나만의 어리석음인가?

 

2004.11.04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도 전쟁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곳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 피난처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가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곳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현장 안내문)

202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