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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양산시

양산...가야진사(伽倻津祠)

by 임병기(선과)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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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사

낙동강 강가 나루터에 자리했던 용신을 모셨던 사당으로, 근자에 복원한 것 같습니다.

신라 눌지 마립간이 가야를 정벌 할 때 건넜던 이곳 나루를 통해 오고 갔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산군조」에, “사전(祠典)에 공주(公州) 웅진과 함께 남독(南瀆)으로 삼았으며 중사(中祀)이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 「양산군」에는 “군 서쪽의 가야진은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하는데 용이 사는 곳으로 1421년(세종 3)에 용이 나타났다.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가야진사가 낙동강의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수운의 안전과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기원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신라 눌지 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로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가야진사는 1644년(인조 22)에 중창이 되었다. 성종 연간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가야진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창 당시 군수는 정호인(鄭好仁)이었다. 원래 있었던 곳은 분명하지 않으며 1708년(숙종 34)에서 1983년까지 천태산 기슭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은 1966년이다. 이 과정에서 칼과 신, 갈퀴, 목기 등이 없어졌다고 한다."(디지털 양산문화대전)

 

천제단

사직단처럼 복원하였습니다.

기우제를 올리는 곳인가요?

 

가야진사. 삼룡문. 용산재(서화당). 상경문

문이 닫혀 까치발로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상경문(尙敬門)

외삼문입니다

 

용산재(龍山齋), 서화당(瑞化堂)

바깥에는 용산재, 안족에는 서화당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전당후묘의 배치에 준하여 복원한 건물로 추정됩니다

 

삼룡문(三龍門)

내삼문입니다

 

가야진사(伽倻津祠)

사당입니다

내부에는 위패와 더불어 용 3마리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합니다

"가야진사에는 용신설화가 있다. 옛날 양주 도독부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꿈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멀리하니 첩용을 죽여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전령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음날 첩용을 죽이기 위해 용소에 갔는데, 실수로 남편용을 죽이고 말았다. 슬피 울던 본처용은 보답으로 전령을 태우고 용궁으로 갔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 재앙이 그치지 않아, 사당을 짓고 용 세 마리와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디지털 양산문화대전)

 

군수 이만도 불망비

行 郡守李晩燾永世不忘碑

崇禎紀元後五庚辰年(1880년)  4월 건립

 

이만도(1842~1910)

안동 출신. 퇴계의 후손, 24세 과거 급제

양산군수(1876년~1878년), 재직 시 양산향토지 발간, 1876년 양산군수 재직시 홍수와 흉년에 녹봉을 털어 백성을 구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5년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1910년  한일병합이  일어나자  24일간  단식 끝에  순국하였습니다.

 

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

용산이 있고, 용신을 모신 다고 합니다.

즉, 신라와 가야의 배경과 국가 주도의 제례의식은 차치하고도, 낙동강 하류의 농경사회에서 중시하던, 비와 물을 관장하는 용을 모셨던 민간신앙처로 이해됩니다.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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