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 묘역
도봉로 169라길 111-10
1호선 도봉역에서 무수골 방향으로 진입하면 되며, 입구까지 차량 진입 가능합니다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 李氏 寧海君派 墓域)
세종의 아들 영해군, 부인 임천 군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장인 좌찬성 신윤동(申允童), 장남 영춘군의 아들인 손자 완천군 희(完川君 禧),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맨 아래에 충노(忠奴) 금동(金同) 묘가 있고, 이 능선 동쪽으로 차남 길안 도정(吉安都正) 이의(李義)의 묘가 자리합니다.
영해군(寧海君 李瑭. 1435~1477)
세종의 17남(서자 중 9남)이며 어머니는 신빈 김씨(愼嬪 金氏)입니다.
부인은 임천군부인 평산 신시(林川郡夫人 平山 申氏), 신씨가 낳은 장남 영춘군 인(永春君 仁), 차남 길안도정 의(吉安都正 義), 장녀 이씨가 있으며, 시호는 안도(安悼)입니다.
금동의 묘. 묘비
묘역 아래 주인 이기 묘 옆에 자리합니다
묘 앞쪽의 묘비는 장방형 비좌위에 멀리서 보면 마치 부도처럼 보입니다.
비신 전면에 충노 금동(忠奴 金同)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동은 영해군 이당(李塘)의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차남 이기(李祺) 집의 종이었습니다.
노비 금동은 주인 이기를 대신하여 죽는 순간까지 모두 자신의 죄라고 하였으며,다고 합니다. 중종 반정 후 면천되고, 묘와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연산군 대에 나주 기생 출신의 나인 김숙화(金淑華)가 이기(李祺)의 집을 빼앗으려 하였는데, 당시 강녕 부정(江寧副正)으로 있었던 이기가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이기의 집 노비 금동(金同)과 함께 거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김숙화가 연산군에게 무고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이기의 부모·처자·형제·장인을 모두 연좌하여 가두어 국문하도록 명하는 한편, 집을 봉하고 노비를 모두 잡아오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추관(推官)들에게 낙형(烙刑)을 쓰도록 닦달하는 한편, 이기 형제의 죄를 정하여 유배지를 정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리고 이기와 그 아버지, 형제의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았으며, 이기에게 장(杖) 100을, 그 아버지에게 장 80을 때려 유배지에 보내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이기의 가문은 복권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좌
저석, 중석, 갑석이 일석입니다
중석에는 장방형 각 면을 탱주로 구획하여 2좌의 안상을 새겼습니다.
안상은 가로가 넓고 길쭉한 十 자(字) 형태입니다.
고 충노 금동(故 忠奴 金同)
금동은 쇠똥의 이두식 표현이라는 글도 있습니다
배면
전면과 다르게 비신 상부에 연맥과 연잎, 보주에도 연잎을 새겼습니다.
연잎은 바람에 실려 살짝 들어 올린 모습입니다.
연화형 보주 아래에는 굄을 마련하였습니다.
영해군 묘역
장인 묘역도 함께 조성한 사례이며, 금동 묘비 조성 배경에 등장하는 나주 기생 김숙화의 일화를 통해 연산군의 흥청망청 실상과 폭정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1.12.29
우리나라의 충노.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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