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도평리 의마총

임병기(선과) 2021. 12. 2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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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 도평 1리 소용 마을 뒤편에 있습니다.

마을회관 주차 후 5분여 소요됩니다.

 

의마총

충장공 이언의 장군이 탔던 말 무덤입니다.

 

이언의(李彦儀.1600~1637)

"1600년(선조33) 성주군 신곡면(現감천면 도평리)진사 이낭동과 완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윤칙(允則)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라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6년간 여막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밤낮으로 곡을 하니 원근동에서 하늘이 낸 효자라며 칭송이 자자했다.

 

이후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충장공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초야에 묻혀 글만 읽고 있으랴”하며 사재를 청산해 인근 동리에서 의병을 모아 크고 작은 전투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도일대의 의병과 관군 4만명이 합세하여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을 지휘관으로 삼아 근왕병(勤王兵)을 구성하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했는데 그해 1월3일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청군 기병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충장공을 위시한 수많은 우리 병사들이 장렬히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뒤 청군은 우리군사들의 시신을 대부분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충장공의 시신도 이로 인해 수습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이로부터 3일 후의 일로 마을 뒷산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 식솔들이 나가보니 장군의 애마가 전신에 창상을 입은 채로 피 묻은 투구를 물고 쓰러져 있었는데 말은 그로부터 3일 후 주인을 뒤를 따라 죽고 말았다.

 

집안에서는 충장공의 시신도 없이 말이 물고 온 투구를 안장하는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 장사 지내고 주인이 전사하자 투구를 물고 며칠을 달려 죽음을 알린 의로운 말을 기려 마을 중앙의 뒷재에 말을 묻어 의마총(義馬塚)을 만들고 의마비(義馬碑)를 세웠다. 나라에서는 호란이 수습된 후 경상도 관찰사의 천거로 공신록에 충장공의 이름을 올리고 충장 위호군(忠壯衛護軍)을 하사했으며 개령 현감 이종상(李鍾祥)이 묘갈문을 짓고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이 영모재 기문을 닦았다."(김천문화원)

우리나라의 동물 무덤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3

 

20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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