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삼각산 흥천사

임병기(선과) 2021. 12. 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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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일년뒤 1398년에는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대규모의 사리전을 세웠다. 조선초기의 고승이신 신미대사(1403-1480)가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던 도량도 흥천사였다 흥천사는 도성 안에 있었던 대찰로서 1424년(세종 6년)에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되었는데 현재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이었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청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 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고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1510년(중종 5년)에는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뒤 1569년(선조 2년)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흥천사에 전해지고 있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 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지치고 힘든 이들의 휴식처이자 치유처인 삼각선원을 지었다. 2015년 저소득 맞벌이 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인 흥천 어린이집을 건립, 개원하였다.

 

극락보전

조선 태조가 신덕왕후의 원찰로 창건한 흥천사의 극락보전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봉안한 법당이다.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건축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두었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 마루이고 천장은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되어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이 극락보전의 구조와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극락전 불단

 

목조여래좌상

목조여래좌상으로 크기로 보아 『조선총독부관보』 1811호 (1933년 1월 24일)와 『봉은본말사지』(1943년)의 흥천사 목록에 보이는 1척 8촌의 아 미타불상으로 생각된다.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신체 비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며, 앉은 자세와 신체 비례, 세부 표현 등에서 1606년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 여래삼불좌상(보물 제1719호), 동학사 아미타불상, 석가여래좌상 등과 비견된다. 조 성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양식적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1894년 작성된 ‘흥천사사십이수관세음보살불량시주’ 현판 기록에 따르면 19세기경부터 흥천사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1450년 전후 티베트계 관음보살상과 가장 흡사하고 당시 조성된 장신 계통의 보살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길고 세장한 관과 얼굴, 신체, 손과 손가락 등 장신의 늘씬한 양식을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특히 뛰어난 작품성을 감안했을 때 국가 장인이 조성한 뒤 왕실사원인 흥천사에 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세상에 현존하는 4점의 42수 천수천안관음보살상 중 하나이므로 그 희귀성은 물론 조선 초기 신앙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2수 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신앙이 많이 됐지만 상으로 남아있는 예는 굉장히 드물고 또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서는 흥천사 42수 관음상이 유일하다.

 

목조보살좌상

목조보살좌상은 조선후기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보살상보다 머리가 크고 어깨가 좁은 편이며, 상반신이 길고 하반신이 넓은데, 조선전기 유행한 신체 비례를 보여준다. 양식적 특징과 복장물로 발견된 묘법연화경이 16세기 간행된 점을 미루어 보아 조성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크기로 보아 『조선총독부관보』 1811호(1933년 1월 24일)와 『봉은본말사지』(1943 년)에 기록된 대세지보살상(3척 7촌)으로 생각된다. 흥천사 목조보살좌상은 보존 상 태도 완전하고, 양식상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조 각사 연구의 기준작이 된다.

 

영친왕이 5살에 쓴 글씨라고 합니다

 

신중도

군도 형식의 신중도로서,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는 제석·범천 등 천부 세계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천룡부를 나타내고 있다. 남아있는 화기 내용으로 보아, 광서 11년인 1885년 대허체훈(大虛體□訓)이 책임 화승을 맡고 보조화승으 로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활약했던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적 화승 중 한 명인 비구 긍법(比丘肯□法)에 의해 조성된 왕실발원 불화로 짐작된다. 참여 화승들이 만세루에 봉안된 1890년 작 신중도 제작에도 동참하였으며 두 신중도가 공간배치 및 도상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 두 불화의 영향관계를 엿볼 수 있다. 

 

천룡도(天龍圖)

천룡도는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함께 그린 것으로서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 안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위태천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천녀와 일월천자, 여러 신중 들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인물 표현에 음영법이 사용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붉은색 이 많이 사용되고, 일부 화려한 금박이 사용되어 19세기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특색을 보여준다. 화기에 의하면 1898년 용담(蓉潭)이 초본을 그렸다.

 

현황도

사람이 죽어서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현왕여래(現王如來)를 중심으로 묘사한 불화. 흥천사 극락보전 안의 현왕단(現王壇)에 봉안되어 있다. 현왕은 사람이 죽어서 3일 만에 심판을 받는 명간교주로 신앙되고 있는데 명부와 세간을 오가므로 명간교주(冥間敎主)라고도 부른다. 보현왕여래의 화신이며 명계(冥界)에 있을 때는 염라대왕이라고 부르고 명부를 떠나 현세에 올 때의 이름이 현왕이다. 흥천사의 현왕탱화는 중앙에 현왕여래가 있고 광배(光背)의 좌우에 동자상(童子像), 바로 아래쪽 좌우로 좌우보처인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에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시립하고 있다.

 

42수관세음보살불량시주 현판. 1894년

 

도량신도(道場神圖)

처음 접하는 불화입니다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도량신도로서 도량신은 <화엄경> 약찬게에 등 장하는 화엄신중의 하나이며 도량의 더러움을 없애는 신이다.


도량신을 단독탱화로 조성·봉안한 매우 드문 예로, 흥천사의 도량신도는 단독탱화 로 조성된 도량신도의 대표적 작품으로 19세기 말 도량신 신앙의 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며, 서울·경기지역의 서양화법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했던 대(태)허당 체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885년 조성된 극락보전 신중도와 증명비구, 화승, 시주 등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885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문화 재의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감로도. 1904

 

극락보전 우물 천정

 

반야용선도

 

산신도(?)

 

명부전

흥천사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철종 6년(1855)에 순기(舜猉)스님이 세웠으며, 고종 31년(1894)에 중수되었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좌우에 풍판을 달았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다. 내부에는 살미첨차가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조각하였다.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모양 있게 장식하였고, 안으로 용꼬리를 새겨 놓아 건물의 격을 높이고 있다.

 

건물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도명존자·시왕·판관·인왕상 등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뒷면 벽에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와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은 안락한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부처를 가까이 모시는 협시보살이기도 하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장엄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부전 현판은 고종의 글씨라고 합니다

 

석조지장보살좌상. 시왕상

명부전에 봉안된 총 27구의 불상으로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 도명존 자를 협시로 한 지장삼존상, 시왕상 10구, 귀왕상 2구, 사자상 2구, 판관상 2구, 금강역사상 2구, 동자상 6구이다.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석재로 조성되었고, 사자 상과 금강역사상은 흙으로 조성되었다.


흥천사 명부전의 불상들은 조성발원문이 없어서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세기 후반의 조각승 승호와 그 계보가 만든 불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17세기 후반 영남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총독부관보』 1811호(1933년 1월 24일)와 『봉은본말사지』(1943년)에 흥천사 지장삼존상과 시왕상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흥천사 명부전 불상은 보존 상태도 완 전하고, 17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시왕도

19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 제작된 지장시왕도 형식 가운데 선행되는 사례이자 모본이 되는 작품이다. 본존인 지장보살이 보주를 두 손으로 받들고 지장보살 석장을 선악동자가 들고 있는 새로운 도상이 나타난다. 안정된 구도, 19세기 후반의 화풍이 반영된 존상표현과 홍색을 기반으로 녹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구사력, 세부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표현 등이 조화를 이루어 수준 있는 화격을 유지하고 있다.

 

대방

1865년 흥선대원군이 직접 시주하고 모연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직접 현판까지 적었던 전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도에는 본전인 법당 정면에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천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누각 대신 대방(큰방)이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인 능찰(陵刹)에서 보이는 가람배치이다. 대방은 H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였으며, 전면은 겹처마의 2익공(翼工)집이고, 측면과 후면은 민도리집으로 구성하였으며, 전면양끝에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부 가운데는 대방 8칸이 있고, 그 앞뒤에 퇴칸이 놓여 마루를 구성하며, 대방의 좌측에4칸 크기의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작은 방과 헛간이 달려 있다. 따라서 누각과 방사와 법당과 숙소 및 부엌의 기능까지 합친 종합적인 다용도의 공간으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의 건립 시기는 사중에 보관 중인 현판 기문(京畿右道楊州牧地三角山興天寺寮舍重創記文)을 근거로 고종 2년(1865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흥천사. 대원군 글씨

 

흥천사. 중국 사신의 글씨?

 

옥정루. 대원군 글씨

 

종각. 위창 오세창 글씨

 

서선실. 대원군 글씨

 

만세루

송종헌(친일파 송병준의 아들)의 글씨.1926년

덕수궁 흥천사명 동종(2014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4503?category=5099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의 답사로 인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노전의 석조약사여래좌상, 대방의 목조관음보살,  많은 불화가 있음에도 인연 짓지 못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순례하고픈 절집으로 남겨두어야겠습니다.

 

2021.11.18

 

(불상, 불화 등의 설명은 흥천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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