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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강진군

강진...천개산 정수사

by 임병기(선과) 202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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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2009년 이후 다시 찾았습니다.

https://blog.daum.net/12977705/8722971?category=5195

 

주차장이 넓은진 탓인지 기억 속의 동선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믿지못 할 기억의 편린...

 

현감이후송덕비 縣監李侯頌德碑 

 …甲子十月中旬 江右 金履載 書

 

1793년 이면휘(李勉輝) 현감이 강진으로 부임해 와서 정수사에서 고금도에 있는 관왕묘를 관리하겠다고 상소하여 정수사에 부과된 세금과 잡역에서 면제시켜 주어 폐찰 지경의 정수사를 지켰다고 합니다

 

김이재(1767~1847)

강우 김이재 생몰년대(1767~1847)로 판단하면 갑자년은 1804년이며, 선생이 고금도에서 해배(1805년) 전에 쓴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금도 관왕묘(우리 카페. 라호르 님 사진)

 

또한 송덕비는 정다산이 강진 유배 중에 정수사에 들려 남긴 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로 판단하면 글을 쓴 김이재와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에 도착해서...정다산

 

시내 어귀 휑한데 찬 볕마저 스러지니

산바람 소슬하다 수염을 불어가네.

푸른 단풍 붉은 나무 차례로 늘어선 곳

묵은 등나무 괴이한 넝쿨 멋대로 엉겼구나.

 

숨은 물소리 쟁글쟁글 돌 기운 차가워서

세속에 찌든 속이 정신이 번쩍 난다.

부도는 무너져서 벌들이 집을 짓고

허수아비 낡고 썩어 이마에 버섯 돋았구나.

 

문에 들자 황폐한 향대가 눈에 뵈니

믿는 이가 슬픈 마음 일으키기 충분하다.

학사의 새 비명碑銘에 낯빛이 환해져서

>지팡이 짚고 비문 보며 자꾸만 배회한다.

 

운계천기대사의적비(雲溪天璣大師義積碑)

천기대사에 관한 기록은 잘 검색되지 않습니다.

천기대사는 강진군 대곡면(군동면의 옛 이름) 석교에서 태어났으며 밀양 박씨다. 천기대사는 어려서 불문에 들었지만 품행이 남달라 벽암대사와 함께 남한산성을 쌓고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천기대사는 이판겸수어사, 북한산총섭등을 지냈고 운계집이란 문집이 전한다."(출처.강진신문.2003년 5.10)

 

퇴은당 염걸 장군 전승기적비(退隱堂 廉傑將軍 戰勝記積碑)

 

염걸(廉傑, 1545~1598)

"1592년 임진왜란 때 두 동생과 아들을 불러 나라의 위급을 구하는 길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는 길뿐이라고 역설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그는 의병 창의 부대를 편성한 후 구십포 해안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후퇴하면서 적군을 정수사 앞 들판과 계곡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찌르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강진 등지의 바닷가 여러 고을 백성들은 염걸의 지략과 저항에 힘입어 오랜 기간 전화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그의 공로를 장하게 여겨 1597년 4월 그를 의병장으로 임명했다.

염걸은 부산 몰운대 전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으며 1598년 노량해전 때 도주하는 적선을 쫓아가다가 거제도 앞바다에서 54세의 나이에 순절했다. 가족들은 그해 11월에 의대(衣襨)로 초혼하여 장사를 지냈다. 염걸은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정수사 주변 계곡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일본군 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염걸 등 의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수사 주지 스님이 2003년에 정수사 입구에 염걸 장군 전승 기적비(파주 염씨 임란사충 전적비)를 세웠다."(다음 백과)

 

입석

 

돌다리

 

우리나라의 옛다리. 석교비

https://cafe.daum.net/_c21_/bbs_nsread?grpid=dRVf&fldid=MebK&contentval=0005N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33&searchlist_uri=%2F_c21_%2Fcafesearch&search_ctx=LrpNuZSucOsx.YncUoV2ej_tRpHqkOL1hFNwnK7pMwx2pUU9oYvq-CADq-lzJK_pvUKb7yb4c6zjTiqtpKnSCNifajP7gdnedVUvl41NBoCU-C.634PqdBf_BhqbsuaQMn-mMJOh56j1v7QL7unL4BWo8U_EHpVHYw-97zu.mrDqQYRB1gWweQnYOhoQghxQcAOIriRxuymeebEYeIXHcT9hYn3y.mY52FnpTBC7Rhl3YI5fshIuFpqbvKrkq4MbNkDRPAC2yBiYdQN4NcBKaum8vSQNQH9qMyP-TNdRGkS4ESX1tiHTHMYR6k9ulA3A

삼청루

 

괘불대

3쌍의 괘불대가 대웅전 중정에 있습니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축대 맨 왼쪽 괘불대에 명문이 있습니다.

 

康熙四十七年 戊子 八月日. 化主 李得宗

강희 4년은 1708년입니다.

 

명문이 있는 사찰 유물

https://cafe.daum.net/_c21_/bbs_read?grpid=dRVf&fldid=MebK&contentval=0005o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60&page=2&prev_page=1&firstbbsdepth=0006Pzzzzzzzzzzzzzzzzzzzzzzzzz&lastbbsdepth=0005wzzzzzzzzzzzzzzzzzzzzzzzzz&listnum=20

 

대웅전

한참 바라보아도 더 바라보고픈 전각입니다

 

대웅전 삼불상

본존과 우측 목조 불상은 1648년 봉안되었으며, 우측의 소조불은 1561년에 조성

 

臺座墨書 : 緣化秩 重修改金 大法堂 三尊 本寺 諸庵及外屬庵佛相三十位幷合同

天蓋山 雙溪寺 順治五年戊子五月日成 證明 普齊 持殿 懷卞 畵員 勝日 性照 戒贊 智安天學 戒明 勸化 香淋 住持三綱 別座 智英供養主 性訥 玉晶  乾隆四十四年戊戌三月二十四日始役於四月初 三日畢功也

 

순치 5년(1648년 봉안된 불상)을 건륭 44년( 1779년 4월)에 개금 하였습니다

아래 기사에는 존재 선생의 개금기를 1778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개금 회향 이전에 개금기를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링크된 기사의 "1861년(영조 37년)"은 1761년의 오타입니다.

 

대웅전 삼존 개금 시주기(大雄殿三尊改金施主記)... 존재 위백규(1727~1798)

http://blog.daum.net/kht1215/98

 

본존불(석가보니불)

 

"불상을 조성한 승일은 17세기 중반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을 대상으로 조상 활동을 펼친 조각승이었다. 승일은 1640∼1670년대에 자신의 독특한 작품으로 많은 불상들을 제작하며 일군의 제자들을 거느린 유파의 수장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제자로 추정되는 성조(性照)와 삼응(三應)은 승일의 작풍을 따라 승일파를 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목조 삼세불좌상은 그의 독자적인 작풍이 발현된 현존 첫 작품이다. 정수사의 석가불과 약사불은 승일에 의해 1646년(인조 24)에 조성된 구례 천은사 수도암(修道庵)의 아미타상과 대세지상의 얼굴, 체형, 옷 주름 등과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얼굴은 상하로 길쭉하였던 수도암 불상들과 달리 턱이 각지고 폭이 넓은 얼굴로 바뀌었으며, 상체의 폭이 넓어져 당당한 모습이다. 귀의 형태는 삼각와 주변에 ‘y’ 모양이 깊게 조각되었고, 이병(耳屛)도 돌기처럼 튀어나온 승일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또한 하반신의 옷 주름에도 승일의 불상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적인 표현이 나타나 있다. 중앙에 폭넓고 좌우로 굽은 두 개의 옷 주름이 자리하고 좌우로 한두 줄의 음각선이 양 무릎으로 뻗쳐 나가는 형태가 그것이다. 여기에 간혹 정수사 약사상처럼 왼발 정강이 위로 끝이 예리한 대의의 모서리 자락이 표현되는 경우도 있고, 정수사 석가상처럼 오른쪽 가슴에 끝이 예리한 대의 자락이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다음 백과)

 

약사여래불

본존과 더불어 승일의 작품입니다.

약기가 없으며, 아미타 수인이어서 아미타여래 같습니다

 

소조여래

수인으로 미루어 아미타여래 같습니다.

1561년 1561년 조각승 태보(太宝)와 사담(思淡)이 조성하였습니다.

 

석가여래삼불좌상

일반적으로 약사여래불을 우측에 봉안하는데, 정수사 불단은 소조여래, 석가여래,약사여래를 배치하였습니다.

우측 불상은 1561년, 석가와 약사여래는 1648년에 조성되었습니다.

 

나한전 16나한상

발견된 묵서를 통해 1684년에 조성된 목조 나한임이 밝혀졌습니다.

함께 조성된 목조여래삼존은 강진 옥련사에 봉안 중입니다.

 

강진 옥련사 목조삼존

http://blog.daum.net/12977705/8722969

 

도조사(陶祖祀)

이름이 전하지 않은 고려 청자의 장인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안에는 위패사 있으며, 벽면에는 청자를 빚는 도공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도조사(陶祖祀)

 

혼불등

고려 청자 장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도조사 앞에 세웠습니다.

 

정수사 부도전

http://blog.daum.net/12977705/8727552

 

정수사

고려 청자 장인들이 넋이 서린 절집,

조선 후기 금어 태허, 색난, 승일의 작품을 소장 중이고, 정다산이 강진 유배 때에 친구의 글씨를 찾았다가 남긴 시가 전하며, 임진 왜란 이후 세운 고금도 괸왕묘의 원당 사찰이었습니다. 강진 답사 기회가 되면 꼭 들려보기를 권합니다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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