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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해남군

해남...해창주조장 황국신민서사탑

by 임병기(선과) 202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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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해창 주조장

 

"정원이 아름다운 양조장

40여 종의 수목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해창주조장의 살림집과 정원은 일본 군마현에서 태어나 강진을 거쳐 해남에 정착해서 살던 '시바다 히코헤이'에 의해서 1927년에 지어지고 조성되었다. 해방 뒤에는 해남 삼화초등학교 설립자인 장남문씨가 살았는데 주조장 면허는 1961년에 그이가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로 양조업에 종사하던 황의권 씨가 해창주조장을 인수하여 30년 넘게 술을 빚으며 살았다. 2008년부터는 오병인, 박리아 부부가 살면서 주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주조장은 술을 빚는 곳을 뜻하고, 양조장은 술이나 장이나 식초를 빚는 곳을 뜻한다. 술 면허를 낸 회사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전라도 외 지역에서는 양조장이라는 이름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고, 전라도에서는 양조장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 주조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해창양조장이 아니라, 해창주조장이 된 것은 그런 지역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서다."

(출처.홈페이지)

 

[방방곡곡 노포기행] <36> 전남 해남 해창주조장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5140927757589

 

황국신민서사탑(皇國臣民誓詞塔)

2015년 해창주조장 정원 연못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황국 신민 서사 비는 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내선 일체·황국 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 신민 서사를 새긴 비이다. 황국 신민 서사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이 교학(敎學) 진작(振作)과 국민 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기획하였으며,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李覺鍾)이 문안을 만들었고, 학무국 사회 교육과장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집행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 10월 2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결재함으로써 공식화되어 보급되었다.

 

황국 신민 서사는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낭송이 강요되었으며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의 실천 요강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황국 신민 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보급을 위해 아동용 100만 부, 일반용 20만 부를 인쇄·배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선전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다른 지역과 다르게 비(皇國臣民誓詞碑)가 아니라 탑(皇國臣民之誓詞塔)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아동용 서사입니다.

 

1. 아동용

1) ハ、デアリマス[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ハ、ワセテシマス[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ハ、シテトナリマス[우리들은 인고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2. 일반용
1) ナリ、ゼン[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하련다]
2) シ、クセン[우리 황국 신민은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セン[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단련()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紀元二千六百年 

朝鮮實業株式會社

木浦支店 創業 三十五周年記念 寄贈

 

1940년

조선실업주식회사 목포지점 창업(?) 35주년 기념으로 당시 이곳의  주인이었던 '시바다 히코헤이'에게 기증한 서사비로 추정됩니다.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나라의 황국신민서사비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0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다른 문화재와 더불어 치욕의 역사지만 보존해야 합니다.

보존 보다도 과거를 망각하고, 잊힌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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