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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영암군

영암...남해신사(南海神祠)

by 임병기(선과) 2021.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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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신사는 시종면 옥야리 마한문화공원 안에 자리합니다.

마한문화공원 답사 목적이었으나, 코로나 19로 개방하지 않아 신사를 들렸습니다

 

남해신사는 1997년 목포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로 신당, 내삼문, 외삼문, 익실 등이 확인되었으며, 2001년 내삼문과 신당을 복원하였습니다.

 

남해신사(南海神祠)

고려 현종 때부터 바다에 제사를 지내던 3대  해신제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3대 해신제는 남해묘(영암 남해신사). 동해묘(강원도 동해), 서해단(황해도 풍천)입니다.

 

고려 현종 원년 10년 거란 침입 때에 왕은 이곳(당시에는 나주)으로 피난하여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 백발의 수신이 나타나 몽탄으로 피난하라고 암시를 주어, 바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현종은 환도 후 백발의 신을 위해 당(堂)을 짓고, 인근 6개(나주. 영암. 해남. 강진. 영광. 함평) 고을 수령에게 1년에 한 번 제를 봉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하마비가 세워진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남해당지(南海堂址)로 전남 기념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복원 후 홈페이지 수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 지정면적 8,291㎡. 남해신당제(南海神堂祭)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3대 해신당제(海神堂祭)의 하나로, 고려 때 전라남도에서는 가장 먼저 국제(國祭)에 올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남쪽 45리 지점에 있고, 제의식에서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남해신당은 1098년(고려 현종 19)에 비로소 남해신을 제의식에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라남도에서 통일신라 때 국제터는 영암 월출산(月出山)과 완도 청해진(淸海鎭)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의 남해포(南海浦), 지리산(智異山), 무등산(無等山), 나주 금성산(錦城山)이 있었다.

 

영암의 남해신당터는 남한 유일의 제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이 지역에서는 남해신단(터) 혹은 남해신사(터)라고도 부른다. 남해당지는 해방 후까지도 여객선이 드나들던 곳과 가까운 구릉에 있는데,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바다에서 포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항로 표지 구실을 하였다. 현재 당터는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고 무성한 잡풀로 덮여 있어 명확한 흔적을 찾기 힘들다. 개략적인 당지의 구성을 현지인의 증언과 조사보고서(1986) 등을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당터는 3단계로 층을 두었는데, 북쪽 상단에 2기의 지석묘가 자리잡고 있고, 중단 중앙에는 3칸 제당이 있었으며, 남쪽 하단에는 대칭으로 4칸의 문간채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각 단의 높이는 2m 가량이고 서쪽 담장 밖으로 제각지기의 집이 있었으며 동쪽 담장에도 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당은 단청이 되어 있으며 당 안에 닫집이 있었고 서까래나 용마루는 모두 용각(龍刻)과 용비늘 단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문과 제관방 및 제당 사이에는 보도가 깔려 있으며 장식된 난간석(欄干石)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면, 남해당의 건물은 매우 화려하고 장대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헐려 인근 마을의 동각(洞閣) 개수에 쓰였다고 한다.

 

또 이곳은 제터라 하마(下馬) 경계 표지석이 있었고, 제관들이 머무르던 역촌이 있었다고 한다. 당터에서 50m 떨어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제사용 샘이 있다."

 

내삼문

마치 외삼문 느낌입니다

 

신당

 

남해신사 앞

해방 이후에도 여객선이 드나들었는 항구이었다고 합니다.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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