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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평택시

평택...이대원 장군 묘, 충마총

by 임병기(선과)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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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장군 묘역

홍살문, 비각, 사당(확충사 䨥忠祠), 재실, 우측 가족 묘역 상단에 장군의 묘, 최하단에 충마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홍살문 뒤편

 

장군 동상, 확충사((䨥忠祠)

 

이대원 장군 묘역

중앙 이대원 장군 묘, 좌우 무덤은 정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 용인 이씨(龍仁李氏) 묘입니다.

묘비. 망주석,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습니다.

 

묘비

증가선대부....

부사오위도총...

군전라좌도수군..

정부인 경주 김씨

정부인 용인 이씨

 

신도비각

 

신도비

1699년(숙종 25)에 건립,  남구만이 찬하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진규 작품입니다.

 

이대원 장군

"1566년(명종 21)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83년(선조 16)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으로 있다가 동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수사(水使) 심암(沈巖)에게 넘겼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심암의 부탁을 거절하는 바람에 미움을 샀다.

이어 여수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왜구에게 사로잡혔으며, 이대원은 절명시를 써 가슴에 품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되었다. 손죽도 사람들은 이대원을 잃게 되자 섬의 이름을 큰 인물을 잃었다는 뜻으로 손대도(損大島)라 일렀다 한다. 이에 앞서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은 사실과 심암의 못된 짓이 관찰사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심암은 파면되고 이대원은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의 명이 도달하기 전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이대원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해안 지방의 아녀자들은 물론 기생들까지도 펑펑 울면서 누가 지은 줄도 모르는 다음과 같은 「애도가(哀悼歌)」를 불렀다고 한다. “아, 슬프다/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 오직 나라 위한 충신이셨네/ 배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장수들 물러가고 포로가 되었어도/ 백만 적진 가운데서 주먹을 휘둘렀다네(咄憐哉 鹿島萬戶李大源 端只與國爲忠臣 船入海洋兮 虜進主將退 百萬陣中空張拳).”

 

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이대원 장군을 모신 여수 손죽도 이대원 사당인 충렬사에서는 해마다 3월 삼짇날에 숭모제(崇慕祭)를 모시고 있고, 여수 영당과 고흥 쌍충사(雙忠祠)에도 제향 되었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받침돌

방형, 상부에 복련을 조식, 중석 각면을 2개로 나누고 측면에는 마름모 문양, 정면에는 독특한 안상 안에 원 3개 둥근 문양을 새겼습니다.

 

비머리와 전액

 

비에는 절명시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일모원문도해래(日暮轅門渡海來).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병고세핍차생애(兵孤勢乏此生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군친은의구무보(君親恩意俱無報). 임금과 부모님 은혜 갚을 길 없어

한입수은결불개(恨入愁雲結不開). 원한이 구름 속에 얽혀 풀리지 않네

 

시와 해석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음역은 개인적 해석입니다

 

 

묘역

 

충마총(忠馬塚)

 

충마총비

 

충마의 내력을 비문에 새겼습니다.

장군이 적삼에 혈서로 쓴 절명시를 가족에게 전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동물 무덤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3

이대원 장군의 충의. 절명시. 충마총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 번쯤 뒤돌아 보아야 할 역사이며, 혼이 서린 묘역과 충마총은 그 현장입니다.

 

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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