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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삼전도 비

임병기(선과) 2020. 11. 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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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인조 17년(1639),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청태종의 공덕을 적은 비석으로 비명은 대청 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 황제 공덕비’라는 비명은 여이징이 썼고. 비석 전면에는 만주 글자, 몽골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새겼습니다.

 

 

그날의 조선왕조실록 기록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삼전도비의 글을 이경석이 지은 내력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인조 15년(1,637년). 11월 25일

장유 등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고 이경석의 글을 택하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전면 이수

 

 

전면

몽골어와 만주어

 

 

후면 이수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후면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안고 가야할 몫이기에 조선왕조실록의 글을 옮깁니다.

 

인조 16년(1,638년), 2월 8일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011) 원년012)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013)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014)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측면

 

 

귀부

 

 

 

 

 

 

 

귀부

처음의 귀부로, 비신과 어울리지 않아 다시 만들었다는 설?

 

 

 

광해군

왜 광해군이 떠올랐는지?

 

미국과 중국

그 틈바구니에 자리한 작금의 우리 현실도 한 치 다름없지 않을까요?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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