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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구미시

구미...지주중류(砥柱中流)비.길재 묘소

by 임병기(선과)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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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중류비

구미시 오태동에 위치

2,004년 찾았을 때는 비각이 없었고 풍광이 뛰어났었는데, 공장과 아파트 등의 난립으로 예전의 뷰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천장

 

 

지주중류(砥柱中流)비

1587년(선조 20)에 인동현감 유운룡(柳雲龍.유성룡의 형)이  야은 길재 묘역 앞에 세웠고,

글씨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이며,  뒤편의 명문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이 지었습니다, 

비석은 1789년(정조 4)에 다시 세웠습니다.

 

 

지중중류비(2,004년)

 

장마가 끝나고 더위의 시작이다.

전국이 어젯밤 처음으로 고온다습한 기단의 영향으로 열대야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해야 할 업무가 있기에 바삐 처리하고 오태동을 찾았다. 구미시 오태동 야은 길재 묘역 근처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지주중류비가 낙동강을 굽이 보며 서 있다. 지주중류는 중국 황하강 중류의 석산이 마치 돌기둥처럼 생겨서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충절과 지조로 은유한 것으로 고려말 삼은의 한 분인 길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지주중류는 중국 무왕의 곡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아사한 백이숙제, 채미(採薇), 백세청풍과 동일 의미로 굳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며 오태동의 비석 역시 백이숙제의 무덤에 세웠던 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야은 길재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오태동의 지주중류비는 선조 20년(1587) 인동현감 유운룡(柳雲龍)이 고려 말기의 충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부임 3년째에 유운룡은 야은의 무덤을 크게 정비한 후 낙동강을 굽어보는 아늑한 곳에 방위를 잡고 묘역에 오산서원(吳山書院)과 사당을 지었다.

 

유운룡은 야은의 지주비를 세워 후세에 남기기로 작심하고 가까운 성주의 한강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 정구 선생으로부터 백이와 숙제 지주비의 묵본(墨本)을 얻어온 유운룡은 '砥柱中流' 네 글자를 탁본을 떠 비석에 새겼다.

 

글씨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이며, 비석 뒤에 새기는 글은 당시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자리에 있던 그의 아우 유성룡에게 쓰게 한다. 유운룡은 아우 성룡에게 야은 선생을 황허의 지주산에 빗대 이렇게 일러준다.

 

"강 중에 황하가 가장 크나니 천하를 횡유하고 범람할 땐 곤륜산(崑崙山)을 휩쓸고 여양(呂梁)을 박차고 이락(伊洛)을 삼키고 양송(梁宋)의 들판을 내치고 만물이 모두 휩쓸리나 오직 하나 우뚝 섰다. 사석(沙石) 으로 짓이겨도 홍파(洪波)로 부어도 만고에 하루같으니 충렬의 선비가 유속(流速)에 시립(侍立)하여 변치 않음을 볼 때 이와 같지 않은가.

 

또 시조(市朝)가 변천해 맑은물 구정물이 함께 흐르고 앞에는 작록(爵祿)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도거(刀鉅)의 위협이 뒤따르나 꿋꿋이 도를 닦아 운림(雲林)에 고도(高稻)하는 선비가 지주(砥柱)에 견줄만 하지 않겠는가". 음기의 전문(全文)을 형 운룡이 일러주는 대로 끝을 맺은 성룡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절하며 형에게 "극진합니다. 저도 이를 벗어난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성룡은 명(銘)을 붙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조렸다.

'오산이여 무엇이 있는고 터가 있음이여 집이 있도다

낙동강 물이여 출렁출렁 그 흐름 무척도 길도다

묵정 벌의 한 주먹 흙이여 바로 선생의 무덤이로다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만년을 드리워 빛이 나도다

충성은 과(課)하고 효도를 책(責)함이여 우리에게 은혜함이 한 없도다

난효(蘭肴)를 올리고 계서(桂壻)를 부음이여 영흠이 이르신 듯하도다

고산을 우러르고 청류를 굽어 봄이여 선생을 그리며 잊지 못하도다'.

 

뜨거운 햇살 아래 읽을 수도 없는 비석의 음기(뒷면의 글씨)를 돌아 전면을 보면 비석 전체를 가득 채운 큰 글씨체의 지주중류 4 글자가 음각으로 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비석의 양식인 지붕형의 이수가 없는 것은 지류중류의 본 의미를 살려 암석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란 안내문이 정겹다."

 

2004.07.19

(대구매일신문 지주중류비에서 발췌 정리)

 

 

양청천(楊晴川) 글씨

 

 

후면

서애 유성룡 글씨

명(銘)과 병서(倂書)

 

 

일반적인 비석과 다르게 귀부와 이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주중류의 본래 암석 모습에 따라 세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전 풍광과는 다릅니다.

 

 

길재 묘소

지주중류비 뒤편 마을 가장 안쪽 야산에 위치합니다.

 

 

 

묘역 석물

 

 

묘비

 

 

묘비

 

 

장명등

 

 

문석인

 

 

문석인

 

 

 

멀리 지주중류비가 조망됩니다.

길재 묘역, 지주중류비 답사 후 금오산 자락의 채미정에서 야은 선생의 지조와 충절을 되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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