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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영동군

영동...돈대리사지 석탑재

by 임병기(선과)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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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마을

이른 아침  산촌의 적막을 깨는 승용차의 출현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르신이 다가왔습니다.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깊게 숙인 후 '옛 절터'를 찾아왔다고 방문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그제야 긴장감이 풀린 얼굴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며 사지를 가리킵니다.

 

 

돈대리 사지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쌍림사로 비정한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돈대리 사지는 기존 조사 보고서에 상림마을 서쪽 ‘상림골’ 입구 경작지에 있다고 한다. 또 경작지에는 건물지 석축으로 추정되는 2단 석축이 남아있고, 주변에 어골 문, 복합문, 무문 와편이 수습되어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사찰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상림마을 주민들은 이곳이 ‘雙林寺’로 전해진다고 한다. 쌍림사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黃嶽山에 있다.’ 고 하므로 황악산 줄기가 분포해 있는 상촌면에서 마을 이름이 ‘상림’으로 전해지는 돈대리 사지 일원이 쌍림사 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007년 『충북의 사지』에서는 매곡면 어촌리 황악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청림사터’라 고 구전되는 곳이 쌍림사로 추정된다고 하므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쌍림사는 『燕山君日記』와 『中宗實錄』 기록으로 보아 1497년 이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헌에는 충청도 황간현에 있는 쌍림사가 폐 사되어 쌍림사 밭 20여 결을 고을과 향교에 나누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1508년 節度使가 사사로이 이 밭을 취하였으므로 그 처벌 논의가 『중종실록』에 언급되어 있다. 이후 조선 후기 『梵宇攷』와 『湖西邑誌』, 『黃澗縣邑誌』등에 모두 폐사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실록 연산군일기(1,497년)

장령 이수공이 김효강·홍약충(洪若衷)·심순로(沈順路)의 일과 이조의 관리들이 권세를 농락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좇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청도 황간현(黃澗縣) 쌍림사(雙林寺)에 밭 20여 결(結)이 있는데, 그 절의 중인 정심(淨心)이 그 절의 여종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고 환속(還俗)하였으므로, 그 밭을 이미 고을과 향교에서 나누어 붙였습니다. 이것은 선왕이 시사(施舍)한 밭이 아닌데, 지금 돌려주도록 명하니 미편합니다." 하였는데, 좇지 않았다.

 

조선왕조 실록. 중종실록(1,508년)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충청도 황간(黃澗) 땅의 쌍림사(雙林寺)는 중이 없어 무너져서, 그 전지(田地)를 둔전(屯田),학전(學田)에 붙였는데,

절도사(節度使) 최한홍(崔漢洪)이 입안(立案)을 모수(冒受)하여 자기의 전지로 만들어서, 가까운 데에 사는 백성을 빌려주어 경작하게 하고, 수확할 때에는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도주(道主)로서 이런 탐오(貪汚)한 일을 하였으니,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 전지를 상고하게 하리라." 하고, 또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만약 이미 둔전과 학전에 붙였다면, 한홍이 절수(折受)하였을 리가 없으니,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석탑 부재

그런저런 옛 영화를 뒤로하고 석탑 중석 1점이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주를 모각한 기단 중석재로 추정됩니다.

 

 

 

 

 

창건과 폐사가 전하지 않은 쌍림사

김천 직지사가 지근에 위치하여 관련된 사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미루어 연산군 재위 이전에 폐찰 되었으며 사찰 논 밭이 향교에 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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