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부산시

부산...가덕도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

임병기(선과) 2020. 8.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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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외양포

200년 초, 배를 타고 입도한 기억이 남아 있는데, 오늘은 마을에 있는 일본군 포진지를 답사하기 위해 부산 신항에서 차량으로 들어왔습니다.

 

"외양포(外洋浦)는 본래 가덕도의 대항(大項) 바깥쪽 목[항: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외항포(外項浦)가 >올바른 표기이나, 공식 명칭은외양포 외양포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외양포는 예부터 나룻배가 닿던 포구였다. 해안 절벽 위에 형성된 두 곳의 패총지가 발견되어 오랜 거주 역사를 알게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해군과 육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는데, ‘헌병 새미’라고 하여 일제 강점기 일본 헌병들이 마셨다는 샘이 있고, 그 주변에 땅굴포 포대의 원형이 남아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인근에 두통포[큰 두통포, 작은 두통포]가 있었다고 한다. 외양포 남쪽에는 남산(南山)이 있고, 천수말에서 대항리까지 이어지는 해안 일대는 앞쪽으로 병산 열도와 거제도, 진해만으로 이어지는 수로의 길목이다. 대항에는 바위섬이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는데 남서쪽 3㎞ 지점에 숭어 잡이로 유명한 내동섬이 있고, 서쪽 3㎞ 떨어진 곳에 달팽이처럼 생긴 바위섬 달빙이섬이 있다.

 

남산을 돌아가면 있는 가덕도 최남단의 가덕 등대 앞에는 히녀라는 돌샘이 있으며 대항 서쪽 2㎞ 지점에 모양이 코같이 생긴 코바위섬과 남서쪽 4㎞ 지점에 농처럼 생긴 농바위섬이 있다. 가덕도의 최남단 해안으로서 외양포 앞의 바닷가 자갈이 많은 곳을 자갈I[자갈치]개라고 부른다. 외양포 마을위쪽 산 너머에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6호[1993. 2. 1. 지정]인가덕도 자생 동백군(加德島自生冬栢群)가 자리 잡고 있으며, 세바지 마을을 외양포를 연결하는 고개는 외양포 고개 또는 세바지 고개라고 한다. "(부산 역사문화대전)

 

 

외양포 포진지

외양포가 있는 가덕도는 동쪽으로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이자 해양의 관문인 부산항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일제가 구축한 군항인 진해항을 끼고 있어 양측을 외호하는 방어 기지로서는 적격이었다. 이러한 지리적·전략적 가치 때문에, 일제는 1904년 러일 전쟁 직전에 러시아 함대가 대한 해협을 지날 때 기습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포대 진지를 설치하여 외양포를 요새화하고자 하였다.

 

가덕도 주민들은 일제의 불법적 토지 점령에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은 총칼을 앞세워 위협하면서 군용지로 강제 수용, 1904년 8월부터 12월까지 포대 공사를 강행하였다. 결국 1904년 12월 일본군 포병 제2중대가 외양포에 설치되고, 진해만 앞바다 저도에 있던 대대본부를 이곳으로 옮겨 온 후 1905년 5월 7일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1936년 건립된 ‘사령부 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 표석이 현재까지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진해만요새사령부가 1909년 8월 30일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외양포에는 포병 1개 중대만 배치되었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수차례의 보수 공사를 거듭하여 일본군 군사 시설로 활용되었다.

 

 

포진지 배치도

 

병사(兵舍) 시설과 탄약고, 포대 터 등의 흔적이 있다.

폭 18m, 길이 78m의 장방형 평면으로 바닥을 평탄하게 정지하고, 동쪽의 산록사면은 절개해서 자연적으로 축대를 형성하고, 남쪽·북쪽·서쪽 경계는 인위적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뒤 대나무 등을 심었다. 마치 장방형 저수지를 사면 언덕으로 둘러싼 형상이다. 그래서 공중에서 조망하지 않으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외부에서 엿볼 수 없도록 엄폐시킨 것이다. 사면의 엄폐용 언덕으로 빙 둘러싼 내부에는 표석, 포상(砲床), 콘크리트조의 탄약고, 포측탄고(砲側彈庫) 및 대피소, 방음벽 등이 잘 남아있다. 

 

외양포 포대

동서 약 20m, 남북 약 70m의 네모반듯한 부지 사방에 벽을 만들면서 동쪽과 북쪽에는 시멘트 벽체로, 남쪽과 서쪽은 흙 언덕으로, 사방을 둘러서 280㎜ 유탄포 두 문씩을 설치한 대가 3곳 있다. 그 사이 두 곳에 9.8×10.5m 크기의 이중벽 탄약고를 설치하였다. 이는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함에 대한 방어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외양포 포대의 전략적 목표가 부산과 진해만을 방어하는 데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 옹벽에는 아치형의 요철을 가미하여 만든 병사(兵舍)로 추정되는 6×5m 크기의 시설 두 곳은 외양포 해안에서 가져온 몽돌, 시멘트, 모래를 배합한 시멘트 자재를 써서 포를 발사할 때 생기는 소음과 충격을 구조물이 쉽게 흡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포대를 둘러싼 옹벽은 약 2m의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흙으로 다져 마치 둑처럼 만들었다. 높이가 5m 정도 되며, 각 포진지 앞에는 둑 높이에 이르도록 돌계단도 3곳에 설치하였다.


외양포 포대는 해방 이후 군사 시설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가 국방부 소유로 귀속되어 있다.

현재 마을 주민들은 가옥과 전답을 국가에 임대하여 사용하는 형식으로 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지금도 일제 강점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포대 진지뿐만 아니라외양포 마을내에는 포대 사령부실과 관사, 사무실, 막사, 창고 등 관련 군사 시설로 추측되는 일본식 건물이 다수 남아 있고,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주민들이 거주 용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양포의 군사 시설 유적과 유구는 군사 시설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그 어느 지역보다 잔존 상태가 양호하다.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이 러시아의 남진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하였으며, 식민지화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영토 수탈의 일면을 보여 준다. 외양포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서 개발보다는 보존해야 하는 곳이다. 일제 침략을 후세에게 교육시킬 만한 유적이 그다지 많지 않은 오늘날, 이곳은 교육의 현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부산 역사문화대전)

 

 

외양포 마을 주차장을 거쳐 포진지 입구의 표지석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

소화11년6월(昭和十一年六月)(?)

 

 

탄약고와 방음벽(좌)

엄폐용 벽

포자리(중앙)

 

 

포자리(1)

2기 포와, 엄폐용 벽과 방음 장치

 

 

포자리(1)

좌측 아치형 입구는 막사

 

 

포자리(2)

 

 

막사

 

 

막사

 

 

중앙 벽은 탄약고

2개 탄약고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탄약고(측면)

 

 

탄약고(전면)

 

 

 

 

우물

외양포 마을에는 우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포진지에 딸린 가옥 등의 부속 시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적산 가옥

 

 

외양포 마을, 포진지

그리고

관측소와 지근거리의 동굴 진지 등을 동선에 포함 시키면 좋을 듯합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간직하고 후손에게 넘겨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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