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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춘천시

춘천...현암리 태봉 귀부

by 임병기(선과)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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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리 태봉 귀부

서면 현암리 산 52-1.

카페 메밀꽃필 무렵 향우 측 나무 아래 주차 후 작은 개울 건너 소로가 정상으로 이어집니다.

 

현장 안내문

가봉비의 주인공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봉비는 망실된 상태입니다.

 

 

 

 

 

 

귀부와 가봉 장태 석물

즉 왕으로 등극 이후 세운 가봉 태실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가봉비의 주인공은 누구이었을까요?

그 단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 2월 1일 기해 8번째기사 1570년 명 융경(隆慶) 4년

성태(聖胎)를 임천(林川)에 묻었다.

상이 즉위하였을 때, 성태를 구례에 의하여 좋은 자리를 골라 묻어야 한다는 조정 논의가 있어 잠저(潛邸)를 뒤져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찾아내었다. 그리고 강원도 춘천 지방에 자리를 정하여 공사를 했는데, 거의 끝나갈 무렵 그 혈(穴)이 바로 옛날에 태를 묻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황해도(黃海道) 강음(江陰) 지방으로 옮겨 정했는데, 터를 닦는 동안 정혈(正穴)로부터 몇 십 보(步) 떨어진 자리에서 옛날 묻어놓은 작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도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여기가 정혈은 아니니 작은 항아리 하나가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거대한 공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 알리지 않은 채 추진하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었갔는데, 조정에서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헌부가 사맹을 불경(不敬)으로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대신이 다시 깨끗한 자리를 골라야 한다고 건청(建請)하여 임천에 묻게 된 것이다. 당시 굶주린 백성들이 돌을 운반하는 데 동원되어 성태 하나를 묻는 데 그 피해가 3개 도시에 미쳤으므로 식자들이 개탄하였다.

 

태경(胎經)의 설이 시작된 것은 신라(新羅)·고려(高麗) 사이이고 중국에 예로부터 있었던 일은 아니다. 우리 나라 법규는 국장(國葬)에 있어서는 길지(吉地)를 고르기 위하여 심지어 사민(士民)들의 분영(墳塋)을 모두 파내고 혈을 정하기도 하고, 태봉(胎封)은 반드시 최고로 깨끗한 자리를 고르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의리에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감여(堪輿)의 방술(方術)로 따지더라도 근거가 없는 일이다.

 

즉, 선조의 가봉 태실 귀부입니다.

 

춘천. 황해도 강음을 거쳐 충남 부여에 자리잡은 선조 태실

현재 부여에는 가봉 태실비와 다시 세운 태비가 남아 있습니다.

 

 

 

 

선조 가봉태실비(사진.부여군청)

 

오덕사 선조 개건 태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894?q=%EB%B6%80%EC%97%AC...%EC%98%A4%EB%8D%95%EC%82%AC

 

가봉 장태 석물

우전석입니다.

 

 

 

그런저런 사연을 간직한 귀부

조선왕조 태실 자료를 읽은 후 춘천 현암리와 부여 소재 태실 가봉비, 오덕사  개건비를 답사해보기 바랍니다.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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