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산시

안산...명안공주 묘, 어제치제문비

임병기(선과) 2020. 7. 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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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안공주 묘역

남편 취몽헌 오태주와 합분이며, 뒤편에 시어머니 상주 황씨, 앞에는 양자 오원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주 황씨 묘

망주석이 보이는 묘

 

아들 오원의 묘

 

명안 공주.오태주 합분

묘비, 상석, 향로대,문석인, 망주석,장명등과 숙종이 내린 어제치제문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묘역에 사용된 석물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하명으로 강화도산을 사용하였습니다.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임금이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묘소(墓所) 석물(石物)을 강도(江都)에서 떠오도록 명했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의 진달에 따라 공사(公私)의 석물을 강도에서 가져다 쓰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이를 들어 논계(論啓)하였다. 또한 우선 정하는 산소가 멀는지 가까울는지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의논해서 떠오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내 동생의 상사에 송종(送終)때 쓸 것을 특별히 떠내게 하여 유감스러운 바가 없게 하는 것이 과연 대단히 적당치 못한 일이겠느냐? 하물며 많은 석물(石物)이라 떠내는 역사(役事)가 거창하여, 비록 지금 역사를 시작하더라도 사세가 장사 이전에 다 마치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니, 우선 산소를 정하도록 기다렸다가 떠내자는 말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하였다

 

명안공주(明安公主). 취몽헌 오태주(醉夢軒 吳泰周)

http://www.sisaanseo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68 

 

오태주는 명안공주가 요절 후, 재혼을 하지 않은 듯 양자를 두었습니다.

 

 

묘비

조선국왕녀명안공주지묘(朝鮮國王女明安公主之墓)

수록대부해창위겸오위도총(綏祿大夫海昌尉兼五衛都摠) 

부도총관오공태주도장지묘(府都摠管吳公泰周道長之墓)

 

 

 

 

장명등

왕실에 속한 장인의 작품이었을까요.

미적 감각이 둔한 안목이지만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문석인, 망주석(좌)

묘 좌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망주석 세호(좌)

묘역은 저의 관심 밖이어서 묘역 답사는 일천하지만 좌우 망주석 세호가 좌상우하 또는 좌하우상이 아니라 좌상우상인 작례는 처음 접합니다.

 

문석인, 망주석(우)

 

망주석 세호(우)

다람쥐를 닮은 일반적인 조선 중후기 세호에 비해 당당하고 역동적입니다.

 

숙종은 하나뿐인 혈육이 떠나자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묘를 화려하게 단장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묘 조성과 관련 조정의 반대 여론이 조선왕조 실록에 여러 번 등재되어 있으며 일부만 옮겨 왔습니다.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임금이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묘소(墓所) 석물(石物)을 강도(江都)에서 떠오도록 명했다.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월 26일 경자 2번째기사 1688년 청 강희(康熙) 27년  

임금이 명하여 명안 공주(明安公主) 묘소(墓所)에 보수(步數)를 넓게 정(定)하도록 하고, 이어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수 내에 민간의 전지(田地)를 사서 주고 금경(禁耕)의 땅으로 삼으라고 하였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상운과  영의정(領議政) 남구만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공주(公主)가 비록 종친(宗親) 1품(一品)과는 다름이 있으나, 묘지(墓地)의 보수(步數)는 법전(法典)에 가등(加等)한 일이 없으니, 다만 법전에 의거하여 백보(百步)로 정하고, 보수(步數) 안의 것은 민간의 전지를 사서 주고 보수 밖의 것은 본가(本家)에 값을 주어 사매(私買)하도록 한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6월 21일 정묘 2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사헌부(司憲府)·사간 원(司諫院)에서 명안 공주(明安公主)를 금표(禁標) 안에 장사하도록 윤허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또 김만길(金萬吉) 등을 파직하도록 한 명을 거두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명안 공주를 광주(廣州) 월곡(月谷)에 장사했으니, 대신(臺臣)의 논계(論啓)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석, 향로석

봉분은 나지막합니다

 

어제치제문비 御製致祭文碑

오늘 답사의 주목적으로, 지금까지 비석은 크게 관심 없었지만 향후 특별한 목적으로 조성된 비석은 섭렵하고 싶습니다.

 

숙종이 명안공주와 오태주가 세상을 떠나자 직접 내린 어제치제문으로, 앞면은 오태주, 뒷면은 명안공주에 대한 비통함 담은 애도문이며 대리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또다른 어제치제문비의 사례가 있는지요?

 

능력 부족으로 전체 문장을 확인 못해 안타깝습니다.

누군가의 답사를 기대하며, 일부만 등재된 문장을 디지털안산문화대전에서 가져왔습니다.

 

치제문비(전)

숙종이 사위 오태주에게 내리 치제문

숙종은 ...“……어머니 명성왕후가 당시 부마를 맞아들일 때 그의 나이는 어리지만 일찍이 지각이 트이고 학업의 성취됨을 보고 부마로 잘 골라 뽑으셨는데, 지닌 재주와 뜻을 다 펴지도 못하고 50세도 되지 않아 혼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심정 눈물만 흐른다.”고 애도했다

 

치제문비(후)

숙종은 명안공주에게 보낸 치제문(致쫓文)에서 “…… 언 니 명선과 명혜가 잇달아 죽음에 엄청난 슬 픔을 가누지 못했는데, 이제 배필을 만나는 예를 려서 화락한 금슬을 이루고 장수를 누릴 것을 기약했는데, 하루 아침에 이와 같은 기별을 듣다니------ 유유한 나의 정으 로 그대를 일찍 영결하려니 소리쳐도 응함 이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거늘, 저 푸른 것 이 하늘인데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단 말 인가! 이 환하고 밝은 세상을 버리고 저 어 둡고 캄캄한 세상을 향해 가니, 천장지구토 록 이 애통한 심정 감내하기 어렵다.”라며 죽음에 대해 애도하고 있다

숙종

조선의 르네상스 기반을 만든 임금?

오누이의 가족사는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나 아버지 현종은 조선 국왕중 왕비(명성왕후) 외에 후궁을 두지 않아, 슬하에 숙종, 명선 공주 明善公主, 명혜 공주 明惠公主, 명안공주 明安公主 뿐이었으며 명선, 명혜공주는 혼약을 하였으나 가례를 올리지 못하고 요절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숙종의 명안공주에 대한 각별했던 사랑과 가례 후 23세에 요절하자 애절했던 심정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실려있으며,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가로 달려가서 애절하게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면모이겠지요.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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