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청주시

청주...산덕리 인성군 태실

임병기(선과) 2020. 7. 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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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원경

문의면 산덕리 411

도로변 산덕리 이정표석에서 바라본 태실, 농로를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면 승용차 1대 주차 공간과 태실로 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인성군 태실

얼핏 민묘처럼 보이지만 태함을 묻은 봉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는 반출되었으며, 후에 복원을 다시 하여 태함을 묻고 봉분을 조성하였습니다.

 

태함

1993년 땅속에 묻혀야 할 태함이 노출되어 복원된 모습입니다.

신석과 덮개돌에 돌기 표현은 선조부터 효종 년간에 조성된 태함의 특징입니다.

 

인성군 仁城君(1588~1627)

선조대왕과 정빈민씨의 소생, 배위는 좌찬성에 증직된 윤승길(본관 해평)의 따님이다. 휘는 공(珙),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졌다. 장성하여서는 사옹원과 종부시 도제조를, 종친부의 재직를 겸하였다.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관대하고 엄격했으므로 관기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인조반정 후 왕은 숙부의 예로서 대우를 하였는데, 이괄의 난 때 잡혀온 자들이 혐의를 인성군에게 뒤집어 씌워 결국 인성군은 진도로 귀양을 갔다. 후에 원주로 이배했다가 사친 정빈민씨의 병이 위독하여 도성에 돌아왔다. 그러나 1628년 유효립등이 대북파의 장당을 규합하여 모반을 기도한 때에 추대되었다 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을 가용받아 타계했다. 그러나 인조의 지극한 애정을 받았었기로 1624년 그 부인 윤씨에게 1품의 料를, 1637년 인성군의 관작을 회복하고 그의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케 하였다. 시호는 효민이다. (태실 연구소)

 

인위적 훼손으로 명문 판독은 불가하며, 여러 자료를 취합하였습니다.

 

만력 16년 무자. 왕자 아기씨 태실(萬曆 十六年 戊子 王子阿只氏胎室)

1588년

 

 

萬曆 十六年 戊子 王子阿只氏胎室

 

 

후면

황명만력 16년 무자 12월 15일 사시 립(皇命 萬曆 十六年 戊子 十二月 二十五日 巳時 立)

 

 

皇命 萬曆 十六年 戊子 十二月 二十五日 巳時 立

 

 

봉분 속에 태함이 묻혀 있습니다.

본래 태실 원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태함이 노출된 여타  태실 보다 마음은 편안합니다.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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