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청주시

청주...청주향교.석탑 옥개석

임병기(선과) 2019. 8. 26.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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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향교

홍살문.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 동서무, 증반실 (烝飯室:향불을 피우거나 차를 다리는 전각))를 갖춘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입니다.외삼문을 통하여 명륜당으로 들어가 우측 증반실 옆으로 대성전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고려 성종 6년인 987년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당시 12목의 하나였던 청주에 향교와 문묘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창건년대는 명확하지가 않다.(그 당시 전국 십이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청주향교와 문묘는 『동국여지승람』에 향교:재주동이리 문묘:재향교라 하여 관아 동쪽 2리에 묘학동궁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와 일치하고 있다. 그 후 1444년(세종 26)에 세종이 치병하기 위해 초정에 행행하였을 때 『통감강목』·『통감절요집성』·『통감훈의』·『근사록』·『소학』·『한문』 등 서책을 하사하였고 1464년(세조 10)에는 세조가 속리산 가는 길에 문묘에 대뢰로서 친히 제사를 올림으로써 ‘삼남에서 으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종식된 후 1609년 (광해군 1)에 이르러 본현 남방 기산리로 이건하였다. 1663년(현종 4)에 명륜당중수를 가하였으며 1683년(숙종 9) 현감 이언기가 현위치로 재이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 고종16년에 군수 장한의 주관하에 명륜당에 일대중수를 가하였고, 1905년에 군수 이명재가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1938년에 직원 김명제가 재임중 대성전 중수에 이어 사재를 희사하여 사무실을 짓고 경의재라 제액하고 사무실로 사용하던 중 숭인관 신축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명륜당 번와·도로보수 등 일대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동서양무가 불에 타 1981년에 서무를 1982년 동무를 복원하였다. 조국 광복후 1957년에 처사 채진두의 희사금으로 증반실을 복원하였고 1969~1971년에는 시. 도 보조금과 유림성금으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증반실, 경의재, 홍전문을 중수하고 교직사를 개축하는 등 창건이래 최대중수를 단행하였다. "(청주 향교)


 

하마비


 

성묘비

2000년에 세운 사적비


 

외삼문

2층 루대가 처음부터 없었을까요?


중앙 계단

신도神道라고 설명하고 옆계단(참도)으로 출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입 공간은 다른 향교에서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명륜당

5벌대 기단

대성전이 너무 높아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조성했을까요?


 

내삼문

중앙계단은 신도神道로 남겨 두고 명륜당 측면으로 올라가서 중문으로 대성전으로 들어 갑니다.


흔치 않은, 기억 나지 않은 신도 입니다.


 

대성전, 서무 측면

대성전에는 오성과 송조육현 그리고 우리나라 십팔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까치발로...

 


명륜당에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

좌측에 토벽 하부가  보이는 건물이 증반실 입니다..

 


대성전

내삼문 외에도 측면에 문이 있습니다.

 

 


느티나무와 옥개석

의자 대용 같습니다.

 

 

뒤집힌 옥개석

4단 각형 층급받침이 정연 합니다.


 


옥개석 상부

2담 각형 굄이 조출되었고,층급받침에서 부터 전각까지 돌출되었을 내림마루가 눈길을 잡습니다.

 

 

옥개석 1기만 남아 있을까요?

까치발로 대성전 담장 너머를 기웃거렸지만 확인하지 못 햇습니다.

해설사분은 향교 일원이 절터로 추정되지만 옥개석 외에 불교유적은 없다고 합니다.


무지무지 더운 날

연락하지 않고 가면 두고두고 한을 품겠다는 처자의 협박에 주눅이 들어 션한 팥빙수 한 그릇을 나누고 답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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