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충주...가춘리 낙선군 태실

임병기(선과) 2020. 6. 2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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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가춘리 주동마을 태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철불좌상이 있는 백운암 지근이며, 추평리 삼층석탑, 경종 태실,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와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태봉

본래는 인조와 귀인조씨의 소생인 숭선군과 낙선군의 태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낙선군 태비만  남아 태실의 역사를 되뇌고 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역기능으로 이곳에 있었던 숭선군의 두 동강 난 비는 인근 다리 공사 축대로 사용되었다고 주민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낙선군 태비도 근처 개울에 방치되었던 것을 제자리로 옮겼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태실에는 민묘가 들어 섰으며, 낙선군 태비 옆에는 민묘 주인공 비석이 위치합니다.

 

낙선군(1,641~1,695)

인조대왕과 귀인 조씨의 소생, 숭선군의 동생이다. 배위는 의정부 좌찬성 김득원의 따님이다. 휘는 숙(潚) 자는 자숙(子淑), 인조 26(1648)년 낙선군에 봉해졌다.효종이 즉위하고 인조 말년에 세력을 떨치던 김자점이 유배되자 그의 형이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재기를 노리던 공서파들의 모의가 발각되어 벼슬과 녹을 삭탈당하였고 1652년 해도에 귀양갔다가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되었다. 1656년 대간과 대신들의 의론으로 풀려났고 1659년에 작록이 회복되었다. 어릴때부터 당론에 휩쓸렸으나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 때에는 더욱 예우되었다. 영조 48(1772)년 그의 사우를 수진궁에 두었다. 본래 묘역에 있었던 신도비는 영조 2(1727)년 도총관 박필성이 지었고 여성군 이즙이 글씨를 쓴 것인데 일제 때에 장명등과 함께 밀반출되었다 한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선원계보기략]에 이 낙선군은 선조대왕의 왕자인 의창군 광(珖)에게 입양되어 있다. (서삼릉 태실연구소)

 

낙선군 태비 후면

 

 

낙선군 태비

후면 명문

순치 2년 8월 24일 립 順治二年八月二十四日 立

 

전면 명문

신사년 11월 초7일 축시생  2왕자 아기씨 태실 辛巳年 十 一月初七日 丑時生 二王子 阿只氏 胎室

 

1,641년 출생 후 1,645년 태비를 세웠습니다.

 

 

 

낙선군 태비 전면

 

낙선군 태비 전면

신사년 11월 초7일 축시생  2왕자 아기씨 태실 辛巳年 十 一月初七日 丑時生 二王子 阿只氏 胎室

즉, 이왕자(二王子) 첫째 아들인 숭선군 태비가 나란히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태비는 사라졌지만 숭선군 태비의 명문 일부는 전합니다.

(전)己卯四月十七日卯時生一000. (후)崇德八年十月二十五日

1,639년 출생하여 4년 후1,643년 태비를 조성 하였습니다.

 

숭선군(1,639~1,680) 인조대왕과 귀인조씨의 소생, 낙선군과 효명옹주와는 동복, 배위는 참판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신익전(본관 평산)의 따님이다. 휘는 징徵, 인조 24(1646)년 숭선군에 봉해졌다. 1651년에 누이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56년 부수찬 홍우원, 송시열 등의 소청으로 풀려 돌아온 뒤 관작이 복구되고, 제주에서 진상된 용종마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경이다.(서삼릉 태실연구소)

 

 

 

 

 

 

관 주도의 근대화에 물결에 밀려 사라져 간 우리의 문화재, 마을 신앙, 민속....

부끄러움도 우리의 몫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보호 장치가 시급합니다.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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