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해인사 수미정상탑

임병기(선과) 2020. 5. 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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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정상탑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도 거의 인지하지 못합니다.

설사 답사를 왔더라도 출입이 쉽지 않아 장경각 옆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수미정상탑

팔각칠층석탑으로 돛대 바위에 세웠습니다.

돛대 바위는 1,926년 파쇄하여 대적광전 축대공사에 사용되었고, 1986년 그 자리에 세웠습니다.

 

즉, 행주형국인 해인사 가람을 비보하기 위해 조성한 석탑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야산 치인리 마애불도 배를 운항하는 선장으로 이해하는 글도 보입니다.

또한, 해인사는 화재에 취약한 형국이어서 비보책으로 남산제일봉 정상에 매년 소금 단지를 묻는 의식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해인사의 풍수지리적 위치

 

"흔히 해인사의 지리적 형국(形局)을 행주형국(行舟形局) 곧 큰 바다에 배가 가고 있는 형국이라고 일러 왔다.
가야산 상봉이 남서로 뻗어 내려오다가 남녁 중턱에서 그 능선이 두 맥으로 갈라져 한 맥은 향로봉(香爐峰)을 이루어 길상탑(吉祥搭) 사적비가 있는 곳에 이르고, 한 맥은 학사대(學士臺)를 이루고 일주문(一柱門) 곁에 그 꼬리를 살며시 풀고 있다. 주산(主山)인 우두봉(牛頭峰)이 남쪽으로 뻗어 산의 남쪽 중턱에 해인사의 대 가람이 이룩되었고, 향로봉 능선이 좌청룡(左靑龍)이 되고 학사대가 있는 능선이 우백호(右白虎)가되어, 이 두 능선에 에워싸여 마치 커다란 배가 가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터는 시야가 탁 트여 멀리 안산(案山)인 남산 매화봉(梅花峰)이 준엄하게 바라다 보이는 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남산 매화봉은 풍수지리학에서 볼 때 화봉(火峰)이어서, 그 방향을 향하여 집을 지으면 자주 불의 재난을 당하나 걸출한 도승(道僧)이 배출된다고 하는데, 그런 까닭에서인지 창건한 뒤에 일곱 차례나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찰이 소실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순조(純租)임금 때에 이르러 당우(堂宇)를 건립할 때에는, 이미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던 터라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사찰을 서남쪽으로 보게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형국은 위의 북쪽 끄트머리인, 대장경각의 후동 (後陳)인 법보전 뒤에 있는 돛대바위, 곧, 얼마 전에 다시 건립한 지금의 수미정상탑(須弼頂上塔)에서부터 아래쪽의 남쪽 끄트머리인 일주문 앞의 당간에까지 이르는 남북의 길이가약 1,100척(R)이며 동쪽 극락전 옆의 개천가에  학사대에까지 동서의 폭이 약 500척이다. 그러므로 길이가 1,100척이고 폭이 500척이 되는 크나큰 행주형국인 셈이다.

 

해인사와 같은 행주형국의 터에는 그배가 마음대로 요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백호(白虎)동에 큰 전나무를 잡아 매었으나 그것이 바로 천년노목(千뿌老木)인 학사대의 전나무이다. 또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도 큰 느티나무를 심어 배률 안정되게 하였으며 이 형국의 북쪽 끄트머리인 법보전 뒤에 우뚝 솟은 큰 자연석을 돛대 바위로 잡아 이 배의 돛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묘한 명당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재시대에 돛대바위를 부수고 그 자리에 축대를 쌓아 버렸는데 최근 일타(日院)스님께서 주지를 하실 때 다시 원력을 세워 새로이 돛대바위를 세웠으니 수미정상탑으로 복원되었다.


가람들은 자연히 그 사이에 건립되었는데, 북쪽의 돛대바위와 남쪽의 일주문을 잇는 일직선상에 당우(堂宇)를 짓고 중앙의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매우 질서 정연하게 그리고 균형을 갖추어 가람들을 지어왔으나, 요즈음에 이르러 좌우의 균형이 많이 흐트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배의 중심부인 석탑을 중심으로, 돛대바위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배 중앙부의 일직선상에다 당우의 좌우전후에 알맞게 건물을 배치해야만 배가 기울지 않을 터인데, 최근에 새로운 건물이 너무 많이 생겨난 까닭에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다시 재고해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해인사의 고적(古籍)에 따르면 “사람이 잘되고 못됨은 장소에 딸리고, 영어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거니와, 신라의 명유(名儒) 최고운(崔孤雲)도 해인사의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말하기를 “산의 신령스럽고 빼어남이 부처님(妙德)의 이름과 조화되고, 땅의 형태는 청량(협源)의 승세(勝勢)와 비슷하여 다섯 상투를 갈라 싼 데서 한머리카락을 뽑아내었다”‘고 하여 이 터의 위치를 칭찬하였다. 이 옛말들을 종합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생각하건대,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는 자리는 개산(開山) 당시에도 법당(法堂) 터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에도 있듯이, 그 앉은 방향이 바뀌고 위치가 약간 서쪽으로 편재(偏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행주형국상으로 볼 때 개산(開山) 당시 법당위치인 정남(正南)쪽이 더 좋은자리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큰 법당의 위치를 바꾼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곱 차례의 화재 때문이었으니 순조 18년 서기 1818년에 지금의 대적광전을 건립하면서 좌향을 자좌오향(子坐午向) 곧 정남(正南)향에서부터 인좌신향(寅坐申向) 곧 서향으로 약간 당겨 지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경남 감사 김 노경(金魯敬)이 아들 추사(秋史)를 시켜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椰山海印寺重健上梁文)’을 짓게 하고 그 상량문에 법화경 화성유품(法華經 化城喩品)의 팔방(八方)의 l6불명(十六佛名)과 아미타경의 육방불명 (六方佛名)으로 육위사(六偉詞)를 읽어 화재를 방위하고 진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뒤부터 오늘날까지 160 여년 동안 화재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신이(빼異)하기만 하다.

 

요즘도 혜인사의 화재 방지에 관하여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 한풍습으로 해마다 음력오월 단오날이 되면 산중 대중들이 소풍삼아 남산 매화봉 마루에 소금을 넣은 조그마한 단지를 묻는 행사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그것은 불을 일으키는 화기를 진압하기 위한 행사이면서 한편으로는 해인사와 같이 개울이 비교적 멀리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에게 불에 대한 경각섬을 고취하는 일도 되겠거니와, 우리 풍속에 귀신을 쫓을 때엔 소금을 뿌렸던 것에서도 기인한다하겠다.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슬기와 미적(美的) 감각을 발휘하여 자연과 합일(合一)하려는 정신으로 이룩되어진 귀한문화 유산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바꾸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며 할 수 없이 바꾸더라도 깊이 생각하여 천년 고찰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행하여야 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연 경관과의 조화를 상실하여 본디부터 간직하여 온 사원의 전통적인 인상을 잃어버리고 더불어 그 고유한 정신마저 흔들릴까 심히 걱정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사원이 지닌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형의 아름다움과 분위기를 지키는 데에 온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월간 해인)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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