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해인사 용성스님, 고암스님 부도(승탑)

임병기(선과) 2020. 5. 2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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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탑선원 부도전

용성스님과 고암스님의 부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용성당대선사탑 龍城堂大禪師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부도는 석탑 형식의 부도로, 입구 길상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용성 스님

"1864년(고종 1) ~ 1940년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3, 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참석한 승려. 독립운동가

 

본관은 수원(). 속명은 백상규(). 법호는 용성(). 법명은 진종(). 전라북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남현()이며, 어머니는 손씨()이다.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였으며, 경전 번역 등을 통하여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섰다.

 

7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 「합죽선()」이라는 시를 지었다. 16세 때 가야산 해인사의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화월()을 은사로, 혜조()를 수계사()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의성 고운사()의 수월() 밑에서 수행하고, 양주 보광사()의 도솔암()에서 정진하였다.

 

이때부터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그 의심을 풀었다. 1884년 양산 통도사의 선곡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고, 조계산 송광사의 삼일암()에서 정진하던 중 『전등록()』을 보다가 대오()하였다. 그 뒤 33인의 승려를 모아지리산 상선암()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한편, 각종 경전을 섭렵하였다. 계속 정진하면서 혜월()·만공(滿) 등과 교유하였고, 금강산 불지암(), 보개산 성주암(), 북한산망월사()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05년 보개산에 관음전(殿)을 세우고 『선문요지()』를 저술하였다.

 

1906년 법천암()에 선원을 건립하였고, 1907년 중국으로 가서 중국 불교계를 2년 동안 시찰하였다. 1910년 지리산 칠불암()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저술 작업과 번역 사업에 착수하였다.1911년 서울에 와서 포교를 시작하여, 다음 해 대사동에 선종교당()을 세워 현대적 포교에 앞장을 섰다. 그 뒤 서울 봉익동에 대각사()를 건립하였다. 1919년3·1운동 당시에는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의 대표자로 참가하였다.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3월에 출옥하였다.

 

그 뒤 서울 가회동에서 삼장역회()를 만들어 저술사업에 몰두하여, 『심조만유론()』, 『각해일륜()』, 『석가사()』, 『팔상록()』 등을 저술하였다. 또, 양산 내원사()만일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25년에는 서울 대각사에 대각교()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만주 용정()에 가서 화과원()을 경영하는 한편, 그곳에 대각교당()을 건립하고 선사상을 포교하는 등 선농일치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사원경제의 자립을 위해서는 농사를 짓고 경작을 하면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스로 호미 등의 연장을 들고 노동하였다.

또한, 불교 포교의 일환으로 박한영()과 함께 불교잡지인 『불일()』을 간행하였고, 일요일마다 법회를 여는 일요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불교의식과 염불을 완전히 우리말로 번역하여 집전하였고, 『찬불가()』를 지어 부르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선을 보급하기 위하여 도봉산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총독부에서 주지가 되려면 비구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조항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나이 76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사리탑이 해인사용탑선원() 옆에 있다."(네이버)

 

 

 

 

 

 

 

용성당대선사사리탑비 龍城堂大禪師舍利塔碑

 佛紀二千九百六十八年辛巳七月 日.  龍雲 謹撰 吳世昌 篆 一齋 崔宗瀚 書 

1,941년 만해 한용운이 짓고, 篆(대사법명)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 비신 글씨는 일제 최종한이 썼습니다.

 

 

 

 

고암스님부도.부도탑비

종형 부도로 기단 위에 복련을 조식하고 탑신과 보주는 일석입니다.

 

고암스님(1,899~1,988)

"1899년 10월5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문(尹)선생, 모친은 하원행(河原幸)여사. 스님의 속명은 지호(志豪 또는 之壕). 어려서 한문을 익힌 스님은 적성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합천 해인사에서 제산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들었다. 이때가 1917년 세수 19세였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비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해인사 불교강원을 졸업하고, 1922년 용성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으며, 훗날 용성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스님은 1923년 7월 해인사에서 수선안거 한 이래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덕숭산 정혜선원, 도봉산 망월선원, 백양사 운문선원, 천성산 내원선원, 오대산 상원사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이때 제산.혜월.만공.용성 스님 회상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으며, 유점사.표훈사.마하연.묘향산 등 북녘선원에서도 정진했다.

 

고암스님은 해인사.백련사.표훈사.직지사.범어사 선원의 조실, 그리고 나주 다보선원장,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로 대중을 제접했다. 스님은 1967년 7월 제3대 종정, 1972년 7월 제4대 종정, 1978년 5월 제6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불교 최고의 어른으로 후학을 인도했다. 말년에는 미국.버마.태국.스리랑카.호주 등에서 국제보살계단을 여는 등 해외포교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스님은 1988년 10월25일(음력 9월15일) 오후8시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90세. 법랍 71세였다. "(다음)

 

보호펜스의 궁창이 안상 같습니다.

 

 

 

부도탑비

 

 

스승과 제자

피안에서도 인연을 이어가시겠지요.

 

20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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