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황매산 묵방사지.백련암지

임병기(선과) 2020. 3. 1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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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방사 응진전. 염화실

 

묵방사지.가회면 대기2길 6-170(가회면 중촌리 349-1)

묵방사 유리보전에서 포장된 산길을 잠시 오르면 응진전,나한전이 위치하며,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이곳을 중촌리사지 2로 설명하며 묵방사지로 추정하였습니다.

 

묵방사 창건과 폐사의 사적은 전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사지에는 "홍유 스님(泓宥.1718~1774)의 유삼가묵방사기(遊三嘉默房寺記)에 의하면 황매산내 다섯 시찰 중 당시 묵방사가 유일하게 법등을 잇고 있었으며, 법당法堂, 대루大樓, 종실鐘室, 향각香閣 등의 건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범우고 梵宇攷(1799년), 경상도 읍지尙道邑誌(1832년), 영남읍지嶺南邑誌(1871년,1895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묵방사 보제루는 삼가향교로 옮겼다고 하며,경내에는 스님께서 주변에서 수습한 석조부재들이 여러 점 남아 있습니다.

 

괘불지주

담장밖에 위치

 

 

석조부재

담장에 박혀 있으며, 돌확은 아닙니다.

 

괘불지주

응진전 앞 개울 건너에 위치

 

 

돌확

응진전 뒤편에 위치

스님 말씀으로는 공이 깊게 파여 있다고 합니다.

 

 

장대석

한국의 사지에는 맨위 장대석에 옹정 2년(雍正 2年) 명문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괘불지주 밑에 있었던 부재이며,  명문은 모르고 계셨고,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옹정 2년은 1725년이며, 괘불지주 기단부 혹은 석축 장대석이었더라도 그 즈음에 불사佛事가 있었으며, 괘불탱화를 소장한 큰 사찰이었음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

 

석주 石柱(1)

보제루의 누하주 같습니다.

 

석주 石柱(2)

 

석조부재

스님은 떡틀이라고 하였지만, 석탑 탑신석 또는 부도 기단석 느낌도 듭니다.

 

진입로 우측 개울가의 용도 불명의 부재

스님은 곡식을 갈았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담장에 박힌 부재와 쌍으로 된 부재처럼 보입니다.

 

스님께서

차 한 잔 권하였지만, (대구시민의 자격지심?) 코로나 19가 염려되어 정중하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이제

중촌리사지 1로 내려 옵니다.

 

묵방사 유리광전

 

유리광전이 자리한 곳을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한국의 사지에는 중촌리 1사지로 설명하면서도 주변을 백련암지로 비정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현주지스님의 증언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승려 홍유(泓宥.1718~1774)의 유삼가묵방사기(遊三嘉默房寺記, 1860년 경 만성 박치복(醒 朴致馥.1824~1894)선생의 백련암 감구(白蓮菴感舊)에 백련암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처 민묘 묘비에도 백련암지로 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홍유 스님은 영암사지를 다녀 갔던 기록이 있으며, 적연선사부도를 지나 백련암을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님의 추파집(秋派集)에 “黃梅山 古英俊國師居 其下禁有靈巖寺舊墟 황매산 옛날 영준국사(적연국사의 諱)가 머물던 영암사 옛터가 그 아래 있는데...”.

 

영암사지 적연선사 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741

 

추파 홍유秋波泓宥.1718(숙종 44)∼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승려.

성은 이李, 호는 추파秋波.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0세에 이미 수백 권의 책을 읽어 천재라고 일컬어졌으며, 19세에 방장산(지리산) 백련암에서 가사를 입었다. 처음에는 편양문파鞭羊門派 조관?冠에게 수업하였으며, 그 뒤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았고, 나중에는 벽암문파에 속하는 성안性眼의 법을 이었다. 선종·교종에 모두 통했으나 만년에는 주로 염불에 귀의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유교에도 밝았으며,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산청의 청암사淸巖寺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한 후, 제자들이 영정을 심적암에 안치하고, 탑을 옥류동玉流洞에 건립하였다.  법맥은 선수善修―각성覺性―진언震言―정혜定慧―성안性眼―홍유 이어진다. 제자로는 문연文演·천제天濟·관식慣拭 등이 있다. 저서로 추파집秋波集』 3권과 편지글을 모은 추파수간秋波手柬』 1권이 있다

 

산청 심적사 추파 홍유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963

 

유리보전

주존은 약사여래불이지만 협시는 관음과 지장을 봉안하였습니다.

 

지장보살

 

약사여래

 

관음보살

 

범종

햇볕.바람,눈. 비를 맞으며 법음을 전합니다.

 

만성 박선생강학지소晩醒 朴先生講學之所

묵방사 주지스님께서는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출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성 선생은 한말 대유학자이며,  지리산 유람기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분입니다.

 

만성 박치복 晩醒 朴致馥(1824 ~1894)

"자는 동경(董卿), 호는 만성(晩醒). 함안(咸安) 출생. 아버지는 박준번(朴俊蕃)이고, 어머니는 현풍곽씨로 곽심태(郭心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노론(魯論)』과 『춘추(春秋)』를 7년간이나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는 대책(對策)으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고, 조모의 가르침을 따라 정재(定齋) 유치명(柳致命)의 문인이 되었다. 1849년(헌종 15)에 어머니 상을 맞았고, 1853년(철종 4)에는 아버지 상을 당했다.

 

1860년(철종 11) 가족을 이끌고 삼가(三嘉)의 황매산(黃梅山)에 들어가 백련재(百鍊齋)를 짓고 김종직(金宗直)의 소학강규(小學講規)를 본받아 제자를 가르쳤다. 1864년(고종 1)에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왔을 때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18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888년 소를 올려 남명(南冥)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고, 3월에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1890년『성재집(性齋集)』을 간행하고 또 『성재연보』를 찬하였다. 1894년 6월 연동(淵洞)의 병촉당(炳燭堂)에서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 크며, 특히 성재(性齋)허전(許傳)을 통해 기호노론계의 성리설 등을 받아 들여 이곳에 소개하였다. 그는 문학 방면에서도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로 일찍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다음 백과)

 

박치복 남유기행(南遊記行.지리산) .동유기행(東遊記行.남해 금산).1877년

 

http://cafe.daum.net/moonhawje/MZdW/118

 

박치복.백련암 감구(白蓮菴感舊).1860년

 

 명재형승관남주 名齋形勝冠南州 

 유췌여금세모우 惟悴如今歲暮憂

 유유청천명사경 維有淸泉明似鏡

 천암진영노두두 千巖眞影露頭頭

 

명쾌한 해석은 어렵지만, 묵방사의 아름다움과 홍유스님의 감성을 이해할 듯 합니다.

(한문과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임)

 

부도전

도봉당 부도만 원위치로 전하며 다른 부도는 사찰 불사, 산지 개간을 하면서 수습된 부도와, 흩어져 있던 승탑을 주지스님이 부도전에 모셨습니다.

 

 

2011년 부도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740

 

월성당심열선사비 月城堂心悅禪師碑

부종수교복 국우세홍각  등계행영남도총섭가선대부  월성당심열장로영골탑

(扶宗樹敎福 國祐世弘覺 登階幸嶺南都摠攝嘉善大夫 月城堂心悅長老靈骨塔)

동래 정씨 (1694~1766). 열반 2년 후부도비 세움

부휴선사 6세 법손. 세수 73세. 법랍 55세

건융33년戊子(1768년)6月 萬성堂유붕 찬,  기묵제자질  ㅁㅁ박계ㅁ  승종ㅁ  승평준  승종일  친제자80여원  손제자90여원

 

월성당탑 月城堂塔 1768

 

주암당탑 舟岩堂塔

 

 불암당관우탑 佛庵堂灌宇塔

 

황악당대사탑 黃岳堂大師塔

 

봉암탑 鳳岩塔 1719년 추정

 

회암당晦庵堂의 제자

회암당 부도는 김천 청암사. 함양 상무주암에 있으며, 입적이 1741년입니다.

결국 제자가 먼저 열반에 들었음을 보여줍니다.

 

회암당 부도.함양 상무주암

 

회암당 부도,.김천 청암사

 

봉암당사비 鳳巖堂大師碑 1719년,

채재공 찬. 강세황 전액

 

합천가회면봉암당채환대선사비문(陜川佳會面鳳巖堂采煥大禪師碑文)...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종(敎禪兩宗) 부종수교(扶宗樹敎) 봉암당대선사(鳳巖堂大禪師) 비명(碑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兼) 병조판서(兵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 春秋館事) 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세손 좌빈객(世孫 左賓客) 규장각 제학(奎章閣 提學) 채제공(蔡濟恭)이 찬술하고 글씨를 쓰다.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강세황(姜世晃)이 전액을 쓰다.

나는 어려서 관아(官衙)의 어린이로서 단성현(丹城縣)에 거의 6년간 살았는데 율곡사(栗谷寺)가 그 북쪽에 있었는데, 더불어 말할만한 고승(高僧)이 많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원래 시세에 빠르게 적응치 못하고 자족하는 성격이 처사(處士)와 같아서 일찍이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작년 율곡사의 승려(僧侶)가 그 스승인 봉암대사(鳳巖大師)를 위하여 영정(影幀)을 찬양하는 글을 부탁하여왔는데, 나는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주었고 또 그를 통해 예전에 쌓인 나의 한(恨)을 풀기도 하였다. 금년 겨울 그 무리 풍신(豊信)이 심오한 이치를 담은 글을 맡겨왔는데, 북쪽 서울로 1천리나 달려왔기 때문에 명문(銘文)을 얻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는 모두 거짓이로다. 거짓이지만 무(無)로 돌아가니 무(無)로 하여금 유(有)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무를 유가 되게 하는 것은 법(法)이 아니다. 그러나 무를 유로 되돌려 무를 오래도록 존속케 할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문장(文章)만한 것이 없으니 내 어찌 부탁을 거절하겠는가.


법사(法師)의 이름은 채환(采煥)이요 속성(俗姓)은 조(趙)씨이며 호(號)는 봉암(鳳巖)이니 바로 대소헌(大笑軒)선생 휘(諱) 종도(宗道)의 후손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윤(尹)씨가 특이한 꿈을 꾸고 얻었다고 한다. 조금 성장하니 총명함이 또래를 넘어섰으며 14세에 산문(山門)에 몸을 의탁하여 16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우암대사(雨巖大師)의 문하에서 수도하였다.

 

매일 삼장(三藏)을 강론하고 나서 마침내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두루 지역 내의 유명 가람(伽藍)을 유람하면서 도(道)를 강론하여 떨쳐 일어섰으니, 남악(南嶽), 환성(喚醒), 영해(影海), 호암(虎巖) 같은 여러 법사들이 모두 대사에게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리(闍梨)가 그 고탈픔을 보고 흐느껴 울며 말하기를 “대사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십니까”라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매악(梅嶽)이 무너지면 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바로 입적(入寂)하니 갑자기 절 뒤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는데, 마치 우렛소리와 벼락소리 같았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굴 해져서 쳐다보니 매악이 무너진 것이었다. 이에 크게 놀란 몇몇 뛰어난 학식 있는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불가(佛家)의 부류들은 앞일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신기하고 이상한 말로써 자랑하고 과장하는 것이 보통사람보다 아주 심하다. 그들의 일은 더욱 기이하며 그 말은 더더욱 상도(常道)에 벗어나 있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말을 쫓아 붓으로 기록함으로써 그 망념(妄念)된 것들을 더 퍼뜨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사람은 마음이란 본래 허령지각(虛靈知覺)할 뿐이지만, 오직 중생(衆生)들 만이 비린내와 피 냄새로 그것을 더럽히고 이욕(利慾)으로 그것을 틀어막는다. 따라서 허령(虛靈)한 것은 도리어 어둠에 가려져 버리고 지각(知覺)이란 것은 도리어 어리석고 어두워져 버린다. 결국 이미 눈꺼풀이 생겨 오히려 볼 수 없게되니, 어찌 앞일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그러한 사실을 논할 수조차 있겠는가. 오직 선가(禪家)만이 그러하지 않으니, 면벽(面壁)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조용히 앉아 마음의 본성을 살펴 세간(世間) 일체의 일상적인 일을 꺽어 버리고, 나의 허령지각을 욕심 없는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모두 구태의연(舊態依然)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쓰임새를 나타내는 점에서는 비록 우리 유가(儒家)와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대용(大用)의 측면에서는 같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영(靈)하여서 장애 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 아직 채 싹트기 전에 알 수 있고, 혹은 그러하기 전에 말로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니, 신기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신기함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이치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의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무리의 행장을 살펴 나의 붓끝을 움직이니 어찌 불가함이 있겠는가. 명문(銘文)은 말한다.

내가 선사(禪師)가 아닌데 어찌 선학(禪學)의 얕고 깊음을 알 수 있겠는가.
풍신(豊信)이 발에 누에고치처럼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멀리서 찾아오니 심오하고도 지극히 정성스럽도다.
명문(銘文)을 써서 돌려보내니 그것을 통해 마음으로 위로하노라.

임제종(臨濟宗) 정맥(正脈) 28세 회암당 대선사(晦庵堂 大禪師)의 법(法)을 이어 받으니 바로 우암(雨巖)과 봉암(鳳巖)이다.
수법 제자(受法 弟子) 춘파(春坡) 영오(穎悟) 추봉(湫峯) 풍신(豊信) 윤정(玧定) 용곡(龍谷) 우활(遇闊) 십▨(什▨) 경수(景修)
주지(住持) 굉익(宏益) 보천(保泉) 우계(友桂),수계 자(受戒 子) 연관(演寬) 책우(策祐) 한백(漢伯) 한청(漢聽) 연▨(連▨) 연백(演伯) 인기(印機) 국능(國能) 국심(國諶) 국청(國聽) 국활(國活) 준학(俊學) 우일(宇一) 영우(永宇) 경희(暻禧) 영순(永淳) 영학(永學) 영징(永澄) 연책(演策) 증관(證寬) 치입(致卄) 연백(連白) 증우(證宇) 의잠(儀岑) 영숙(永叔) 연행(演幸) 연활(演活) 극연(克演) 방원(芳遠) 유인(有仁) 복잠(福岑) 영안(永安) 의홍(儀洪) 영수(永修) 학(受學) 김진삼(金進三) 김영우(金永佑) 심국룡(沈國龍) 이진천(李震天) 강억문(姜嶷문) 진성대(陳聖大) 서명삼(徐命三) 김명삼(金命三)

숭정 기원후(崇禎 紀元後) 두 돌, 기해(己亥)(1719년) 4월 일에 세움.

 

송암당선사경일탑 松庵堂大禪師敬一

 

당호 새기지 않음

 

취봉당대사탑 翠峯堂大師塔

 

 봉운(설)탑 鳳雲(雪)塔

 

여곡당화식선사탑 餘(旅)谷堂和式禪師塔

 

 ○○곡당수○탑 ○○谷堂守○塔

 

석곡당 지○(石谷堂 志○)

2011년 사진에는 부도전 앞에 누워 있었습니다

 

부도 옥개석

 

(사진 출처..다음 블로그/ 申祺承의 伸天之路)

 

그나저나 1995년 도난당한 장승은 언제쯤 만행에서 돌아 올까요?

 

묵방사

영암사지 바로 옆이며, 입구에 적연선사 부도가 있습니다.

영암사지 답사 기회가 있으면 동선에 포함시켜 답사의 즐거움을 배가하길 바랍니다.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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