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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해남군

해남...어사 정만석 철비

by 임병기(선과) 2020.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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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 복지회관

화원면 금평리 239번지 소재

 

코로나 19 여파로 복지회관은 폐쇄되었습니다.

 

비각

비석의 본래 위치는 화원면 신덕리이며 1990년 옮겨 왔다고 합니다.

 

어사 정 공 만석 영세불망비 御史 鄭 公 晩錫 永世不忘碑. 

 

정만석(鄭晩錫.1758~1834)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정하경(鄭夏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신(鄭維新)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정기안(鄭基安)이며, 어머니는 김상정(金相鼎)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5년 성균관전적·병조참의를 거쳐 1794년에 지평에 이르렀다. 그 해 11월 양근·가평어사가 된 뒤 호남·호서 암행어사로 나가 명성을 떨쳤다. 1798년 영일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를 거쳐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상우도암행어사를 거쳐 1803년 동래부사 때 뇌물을 받고 대마도(對馬島)와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하였다.1807년 공충도관찰사를 거쳐, 1811년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을 위해 관서위무사(關西慰撫使)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심 수습을 위한 호포(戶布) 징수상의 문제와 논공행상의 불철저로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평안감사가 되었다. 감사로 있으면서 홍경래 관련 죄인들의 문초를 담당해, 이 기록을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이라 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것은 그가 올린 『계첩기략(啓牒記略)』과 함께 조정에서 이용한 홍경래난의 주요한 자료였다. 1815년(순조 15) 한성부판윤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1819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가 다시 경직(京職)으로 돌아와 요직을 역임했고,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불렸다 한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국가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호조판서·선혜청당상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나, 번세(煩細)에 얽매여 대체(大體)에 어두웠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정만석 어사의 공적

1,794년 호남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어사 업무 수행 후 복명은 1795년 5월이지만 어사 직을 언제부터 수행하였는지는 불명)

 

현장 안내문에 의하면, 100년 만의 흉년으로 장흥.해남.진도 군민들이 구휼을 받지 못하고 아사한 경우가 빈번하였는데도 구휼하지 못 한 군수를 파직시키고 구휼미 300석을 베풀어 구제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정만석의 서계(書啓가 실려 있습니다.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5월 22일 임신 3번째 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렸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면휘(李勉輝)와 해남 현감(海南縣監) 정간(鄭杆)과 장흥 부사(長興府使) 허명(許溟)과 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종정(朴宗正)과 영암 군수(靈巖郡守) 최길헌(崔吉憲)과 우수사(右水使) 정언형(鄭彦衡)과 여산 부사(礪山府使) 이점운(李漸運)과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한동(金翰東)에게 모두 불법 행위를 범했다 하여 차등 있게 죄를 매겼다. 만석이 또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1. 호남 전체가 가장 전정(田政)이 문란합니다. 능곡(陵谷)에 재변(災變)이 발생했는데도 예전처럼 세금을 징수하고 있으니, 이는 한 번 변통시켜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행하게 하소서.

 

1. 올해 호남 연해(沿海) 지방에서 죽은 자가 매우 많은데, 호적을 작성할 때 가능한 한 실제 숫자에 입각해서 해야만 잡역(雜役)을 생판으로 물리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게 하는 한편 군사 등록 장부에 등재되어 있는 사망자들도 아울러 특별히 바로잡게 해야 하겠습니다.

 

1. 양인(良人)의 역(役)과 관련된 폐단으로 말하건대, 가령 영장보(營匠保)·읍장보(邑匠保)·사색보(四色保)·삼색보(三色保)·죽보(竹保)·칠보(漆保)·지보(紙保)·향보(鄕保)·이보(吏保)·통인보(通引保) 같은 따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규정 이외에 함부로 책정한 것들이니, 이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바로잡아 고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호남의 도 전체에 고을마다 각각 계방촌(稧房村)이니 원당촌(願堂村)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관가에 소속되기도 하고 향청(鄕廳)에 소속되기도 하여 해마다 돈을 바치고 온 마을이 부역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부유한 집의 건장한 장정들이 종신토록 한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를 일체 혁파하여 모두 군사 등록 장부에 채워넣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진도(珍島)·영암(靈巖)·강진(康津)은 아마도 1백 년에 처음 보는 최악의 흉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는 가을에 농사가 풍년이 든다 할지라도 환곡(還穀)·결전(結錢)·대동(大同)·신포(身布) 및 기타 잡역(雜役)으로서 예전에 정퇴(停退)되었던 것들과 새로 납부해야 할 것들을 한꺼번에 독촉해서 받아들인다면 형세상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 뻔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서 조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략)

 

 

 

갑인 오월 일(甲寅 五月 日)

1794년?, 1854년?

군민들이 철비 앞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합니다.

 

 

귀부 

 

 

귀부 측면


 

이수 전면


 

이수 후면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감목관 비석 군

복지회관 뜰에 위치합니다.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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