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답사 후 지근의 모명재를 찾았으나 15년 전 기억이 가물가물 하였습니다.
모명재慕明齋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拜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대구 관광)
2005년에 올린 짧은 글을 가져왔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62
만동문萬東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에서 유래 낙관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모명재 현판 글씨와 동일인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으로 의리를 지키자라는 뜻입니다.
만동萬東 그 대표적인 충북 괴산 만동묘 글을 가져 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063
모명재 정면 4칸, 측면 2칸 , 겹처마 팔작 기와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툇간을 두었습니다.
기둥의 주련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전한 감사의 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이순신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조선에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성 남쪽 남의 나라 달빛 아래서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참고로 두사충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아산 묘역을 잡아주었다는 내용이 신도비에 실려 있습니다.
모명재慕明齋 고국인 명을 그리워하다라는 의미겠지요
형봉재(兄峰齋) 9대손 두상현이 이름 짓고, 회산 박기돈 晦山 朴基敦(1873~1947)의 글씨라고 합니다.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에 묘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락(요)헌(二樂軒) 낙관을 미처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두번째 즐거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거연천석(居然泉石) 주자의 시에서 가져온 글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팔하 서석지 八下 徐錫止(1826-1906)선생의 글 말년에 팔공산 아래에 살면서 호를 팔하(八下)라고 하였습니다.
팔하 서석지(八下 徐錫止.1826~1906) 시(詩)·서(書)·화(畵)·금(琴)·기(棋)·박(博)·의(醫)·변(辯)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립니다.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萬)의 제자이며,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6.)의 스승. 서병오의 제자가 竹農 徐東均(1902~1978)입니다.대구에서 주로 활동한 듯 선생의 작품이 대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석지가 유명세를 탄 것은 경삼도 관찰사 해장 신석우(海藏 申錫愚.1805~1865)가 1856년 임기를 마치고 이임 할 때 쓰게한 아래의 현판 글씨라고 합니다.
이봉이록爾捧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 그대의 벼슬과 녹봉은 백성의 살과 백성의 기름이요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難欺 백성들을 학대하기 쉬워도 하늘은 속이기 어렵다
(저와 친분이 있는 이영규선생님의 의역)
호남에서 주로 활동한 창암에게 11살(1839) 때 이삼만에게 배웠다는 내용이 필감(筆鑑) 서문에 실려있다고 합니다. 필감(筆鑑)은 고전 서론(書論)에 자신의 창작 경험을 응집한 서예 이론서이며 비평서로 그가 집안에 남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과 함께 아들 중산(中山) 서경순(1850~)에 의해 1917년 대구 재전당 서포(在田堂 書鋪)에서 필감부초천자筆鑑附草千字)로 출판되었다 고합니다. 서경순은 문우관의 진덕문(進德門))을 썼으며 서예가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숭정유루(崇禎遺樓) 숭정(명의 마지막 황제)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모명재기에 9세손 두상현이 이름 붙혔다고 합니다.
루(樓) 두상현 생존시에는 좌측 협실 앞쪽에 루를 걸고 계자난간 등을 설치하였다는 것일까요?
글씨는 추사의 글로 추정된다고 하지만 낙관은 없습니다.
신도비 충무공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1737~1813)가 찬한 비문 입니다. 묘역앞에도 신도비가 있다고 합니다.
몇 문장이 눈에 들어 옵니다. 숭정기원후 삼 임술 崇禎紀元後三 壬戌.1802년 이인수 근찬 李仁秀 謹撰
문인석 모명재 마당 좌우에 서 있습니다. 일견 우리나라 문인석과는 다른 느낌이 듭니다.
명정각(命旌閣) 7대손 두한필(杜漢弼.1823~1893)의 효행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내린 정려각 입니다.
묘 답사는 크게 흥미롭지 않아 두사충의 묘는 찾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모명사상, 청나라 등장에 따른 조선의 외교술과 선비들의 처신. 역사에 가정이 필요치 않겠지만 많은 생각들이 파노라마로 스쳐 갑니다.
2019.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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