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쌍계사지 모운진언慕雲震言 부도

임병기(선과) 2020. 2. 4.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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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지 부도

아주 여러번 들렸고, 스쳐지났지만 부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로 옆

증산 술도가의 막걸리와 묵은지는 즐겼으면서...


(2007.04.24)


전날(2007.04.23) 친구들과 음주 중

청암사를 가고 싶다는 님의 전화를 받고, 비몽사몽 상태로 답사한 사진 입니다.



모운진언慕雲震言 부도

근거?


요즘 부도 주인공을 추적하는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논문 검색은 하지 않았지만,현재 인터넷상에는 어떤 근거인지 벽암각성이 주인공이라는 글만 보입니다.

그냥 수용하면 재미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추적 하였으며, 모운진언의 부도로 확신 합니다

추적 단서는 아래 부도비에서 전개하겠습니다.



모운진언慕雲震言

조선 후기 범종형 부도.

탑구위에 방형 지대석을 놓고 중앙에 홈을 내어 종형 탑신석을 올렸습니다.

지대석에는 귀꽃을 표현한 복련이 있으며, 모서리에는 활짝 핀 연꽃을 새겼습니다.

상륜부는 탑신석과 별석이며,상륜부에는 보주 받침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복련, 보주에는 앙련을 조식하였습니다. 



탑구. 지대석



지대석 복련, 모서리 연화문



탑신석



상륜부



탑신석에는 주인공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부도 주인공은 옆에 있는 부도비를 주목해야합니다.



부도비

하지만 아쉽게도 명문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출처가 어딘지 확인되지 않으나 거의 모든 자료에는 마구잡이로 퍼 나른 까닭에

 "청암사 입구 부도전에는 벽암(각성)의 사리탑과 태감,지성 공덕비"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럴까요?

2007년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찰문화재 자료집에 명문 일부가 실려 있습니다.

그마져도 중요 단서는 판독하지 못 했습니다.


한국의 사찰문화재

"浮休之孫碧岩之OO, 00宗慕雲 ○震○士金OO大 晉陽鄭氏之後裔也 ○ ○○"


부휴지손벽암지OO, OO종모운○진O사금 대진양정씨지후예야OOO

글의 앞뒤는 헷갈리지만

당호의 주인공은 부휴스님의 법손 벽암스님의 OO이며,OO종의 모운OO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부휴선사 법맥을 검색하였더니 부휴.벽암.모운 스님이 등장 합니다.


(출처/불교신문)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부휴스님은 서산스님과 함께 불교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지리산의 신명(信明)장로에게 출가하여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스님에게 심요를 얻어 벽계정심(碧溪淨心, 1414년경)에서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5)으로 이어지는 조선전기의 법맥을 계승했다. 또한 7년 동안 재상(宰相) 노수신(盧守愼, 1515~1590)에게 책을 빌려 읽을 정도로 내전만이 아니라 외전에도 두루 밝았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승풍(僧風)을 잃지 않고 수행을 지속하며 벽암각성과 같은 걸출한 제자를 길러내면서 동문(同門) 서산스님에 버금가는 승려문중을 이루었다.

부휴스님은 1614년 칠불암에서 “칠십여 년을 허깨비 바다에 놀다가 오늘 아침에야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돌아 왔다. 확실히 진성은 원래 걸림이 없으니 어찌 보리와 생사의 뿌리가 있으리(七十餘年遊幻海 今朝脫殼返初源 廓然眞性元無碍 那有菩提生死根)”라는 게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이후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스님의 영골을 모신 승탑이 해인사, 송광사, 칠불암, 백흥암에 세워졌다. 이 사찰들에는 승탑과 함께 진영도 모셔졌겠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해인사에만 유일하게 진영이 전한다. 해인사 진영 속 부휴스님은 기록에 전하는 “배가 부르고 키가 크며 눈썹이 길고 볼이 두껍다”는 묘사대로 골격이 크고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이같은 스님의 풍모는 도와 덕이 사상(四象)과 팔방의 흠모와 존중을 받았다는 해붕스님의 찬탄과도 맞닿아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년)

"벽암 각성대사는 조선 중기 승려로 호는 벽암(碧巖), 속성은 김(金), 자는 징원(澄圓)이다. 보은(報恩) 출생 후 10세에 출가하여 화산(華山)의 중 설묵(雪默)에게 사사(師事), 1588년(선조 21) 승려가 되어 정(晶)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내전(內典)을 배웠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부휴와 함께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12년(광해군 4)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고, 19년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왕을 모시고 설법했다.


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僧軍)을 독려하여 3년 만에 완공(完工)하였고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를 받았다. 32년(인조 10)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를 중수, 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규합,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40년(인조 18) 쌍계사(雙溪寺)로 옮겨 절을 중수하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의 주지로 선교(禪敎)의 사석(司席)을 지내고, 41년(인조 19) 해인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대법회(大法會)를 개최, 묘향산에 들어가 강도(講道)한 후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선교(禪敎) 양종(兩宗)과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고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하였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구례 화엄사에 비가 있다."

출처: https://studybuddha.tistory.com/2296 [불교용어 사전]


모운진언(慕雲震言.1622~1703)

"자는 취고(就古), 호는 모운(暮雲). 경상남도 진주 출신.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의열(義悅)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당대의 고승 벽암(碧巖)의 지도를 받았고, 수십 년 동안 모악산·덕유산·가야산·불암산·황악산·팔공산·지리산·축서산 등에서 수행하였다. 만년에는 『화엄경』에 심취하였다. 1686년(숙종 12) 팔공산 원공(遠公)의 청으로 은해사 운부암(雲浮庵)에 가서 크게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어 교법을 크게 펼쳤다. 1703년 봄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오직 원컨대 부처님이시여, 불쌍히 여겨 섭수하소서(唯願佛哀攝受).”라고 세 번 창한 뒤 3월 21일 입적하였다.제자들이 화장한 뒤 탑을 쌍계사(雙溪寺)에 세웠다. 저서로는 『대방광불화엄경칠처구회품목지도(大方廣佛華嚴經七處九會品目之圖)』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드디어 단서를 찾았습니다.

법맥에서도 모운진언스님이 분명해보였지만,결정적으로 쌍계사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모운스님에 대해 자료를 더 찾아 보았습니다.


모운문暮雲門

"조선 중기의 승려 진언(震言)이 세웠으며, 모운은 진언의 법호이다. 이 문파는 휴정(休靜)과 쌍벽을 이룬 부휴(浮休)의 법맥을 이어받은 벽암(碧巖)의 갈래로, 벽암의 제자 진언은 고행정진(苦行精進)으로 널리 알려졌던 고승이다.

진언 문하에서는 원민(圓旻) 등 대표 제자 11명이 배출되었고, 원민의 뒤를 이은 정혜(定慧)가 고명한 학덕과 선지(禪旨)로써 많은 후학들을 길러 이 문파를 크게 진작시켰다. 그는 『선원집도서착병(禪源集都序著柄)』·『별행록사기화족(別行錄私記畫足)』·『화엄경소은과(華嚴經疏隱科)』·『제경론소구절(諸經論疏句絶)』 등을 저술하여 후학들의 선(禪)과 교학(敎學) 공부를 도왔으며, 옥잠(玉岑)·희열(希悅)·탈원(脫遠)·성안(性眼)·초한(楚閑) 등 23인의 도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성안의 문하 제자인 홍유(弘宥)는 원래 편양문파(鞭羊門派)의 문인인 상월(霜月)의 제자 조관(慥冠)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조관의 권유에 따라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법(法)을 묻다가 성안에게 입실(入室)하여 법을 전해 받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암사 홈페이지


"(전략)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후략)



결론

쌍계사지 부도는 모운진언스님의 부도 입니다

"浮休之孫碧岩之OO, 00宗慕雲○震O士 金OO  大晉陽鄭氏之後裔也 ○ ○○" 

즉,

첫번째 OO은 法孫, 두번째 OO은 화엄華嚴, 세번째 O은 진언震言으로 추정

부휴지손벽암지법손, 화엄종 모운진언(浮休之孫碧岩之法孫,華嚴宗 慕雲震言)이 완성 비명으로 보여, 모운진언으로 확신 후 글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런데

김천 지역 폐사지 검색 중에 2005년 발간된. 문화재청의 사지총람 쌍계사지 설명에 "화엄종 모운당진언대사사리안탑慕雲堂震言 大士舍利安塔"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운당 대사 부도는 분명하지만 예상대로 한국의 사찰문화재 자료집 비문은 뒤죽박죽이었으며

浮休之孫碧岩之OO, 00宗慕雲○震O士 金OO  大晉陽鄭氏之後裔也 ○ ○○" 가 아니라 浮休之孫碧岩之法孫 華嚴宗 慕雲堂震言大士舍利安塔"이 올바른 판독 입니다.



후면

" 徒比 受法 … …. "

거의 판독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운진언 慕雲震言부도

1703년 쌍계사에서 열반에 드신 모운 스님의 부도 입니다.

이제는 쌍계사지 부도로 표기하지 말고 모든 자료에 모운진언 부도로 등재해야 하며 벽암각성이라는 설명은 수정 되어야 합니다.


아래는 모운진언스님 글에서 여러번 등장하며, 함양 상무주암 부도,청암사 부도에서 기술하였던 회(암)당 부도 입니다.



쌍계사지 부도 답사 후

달넘새님을 회(암)당 부도로 안내했습니다.


첫 멘트

"쌍계사지 부도와 동일 유형이지만 시대가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탑구가 없고, 지대석 화문이 생략되었으며, 동일한 구성이나 상륜부에 화문이 없고 전체적으로 략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따로 없습니다.

쌍계사지 모운진언 부도는 1,703년, 회암당 부도는 1,741년에 조성하여 4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는 예전에 올렸던 회암당 부도 관련 글입니다


회암당 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611



일기 예보와 달리 포근합니다.

모운스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겨울 햇볕을 즐길 것 같습니다.


부도 앞 비석

상식적으로는 부도 이후에 조성된 비석으로 추정되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태감공덕비 泰鑑功德碑



자헌대부경월장노태감공덕비 資憲大夫鏡月長老泰鑑功德碑

1,769년


태감대사 공덕비 입니다.

정동우鄭東羽가 글을 짓고 이현복李賢復이 전액篆額과 비문碑文을 썼습니다.

성주 출신으로 대사는 모운진언 대사의 법을 이은 지백대사를 은사로 직지사에서 출가하였습니다.호방한 성격에 고관들과 널리 고류했던 걸승으로 무술에 능해 청년시절 관찰사에 의해 경주진 도총으로 임명되었고, 훗날 남한 산성, 북한산성 총섭으로 임명 되었습니다.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재를 희사하여 1,735년 직지자 대웅전 중수를 비롯하여 각지 사찰에 불사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까지도 쌍계사가 운영되었다는 단초가 됩니다.



건륭34년을축4월일 성주 쌍계사 립

乾隆三十四年己丑四月日 星州雙溪寺立

1,769년에는 행정구역이 성주이었습니다.



쌍계사 지성장로비

溪溪寺智性長老碑



성주쌍계사대공덕가선대부지성장노비

星州雙溪寺大功德嘉善大夫智性長老碑

1,769년


지성장노비

태감대사와 동시대에 세웠으나, 비문을 찾지 못 햇습니다.

언감생심

저의 능력으로 해석은 어렵고...


역시 쌍계사 중수시에 사재를 희사한 스님으로 생각되며, 1769년에 성주 쌍계사에는 큰 불사가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건륭34년을축4월일 립

乾隆三十四年己丑四月日



쌍계사지

많은 유물이 청암사, 수도암, 직지사 성보박물관 등으로 흘러 갔으며,사지에는 모운선사 부도만 홀로 옛영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무흘 구곡처럼 안내문을 설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만의 욕심일까요?


20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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