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었던 다리이다. 세종 2년(1420)에는 다리 옆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 앞에 있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마전교馬前橋라고 불렀다. 세종 23년(1441) 다리 서쪽 중앙에 나무로 수표水標를 만들어 세우면서 다리 이름을 수표교라고 불렀고, 이를 수표다리라고도 하였다. 이 수표는 성종 때에 돌로 만들어 세웠으며, 영조 36년(1760) 대대적인 개천 준설 후에 수표석을 다시 세웠다. 1958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수표교는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서울지명사전)
상판
수표교 표석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물의 흐름이 유연하도록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다음백과사전)
경진지평 庚辰地平 영조 36년(1,760년) 때 준설 후 새긴 글자이며 이후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았다고 합니다.
戊子禁營改造. 丁亥改築
무자금영개조 戊子禁營改造 영조 44년(1768)년 보수
정해개축 丁亥改築 고종 24년(1887) 보수
장충단奬忠檀 250년 전인 영조 임금 때 서울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1895년 8월 19일 밤 궁내대신(宮內大臣) 이경식(李耕植)은 궁중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8월 20일 새벽 일본의 난군(亂軍)과 자객(刺客)들이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乾淸宮)을 습격하는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이 때 이경식은 명성황후를 보호하려다 순사(殉死)하였고 또 당시 부령(副領)이었던 홍계훈(洪啓薰)도 이날 새벽 경복궁으로 밀려드는 난군들의 총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와 광화문을 가로막고 난군의 진입에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수없는 총칼의 상처를 입고 역시 순사하였다. 그 후 고종 임금은 1900년(광무 4) 옛 남소영 터에 제단을 꾸며 을미사변 당시 순사한 두 사람의 충신 및 군졸들의 혼을 받들고 이 제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고 하였다."(다음백과)
장충단비 을미사변 때 목숨을 바친 충신·열사를 위하여 1900년 장충단에 세운 비. 전면은 순종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친필이며, 뒷면의 찬문(撰文)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을 지내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지었습니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쪽으로 옮겼고 합니다.
예필 睿筆 황세자의 글을 일컫습니다. 비문 해석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위키백과)
제일강산 태평세계第一 江山 太平世界 단기 4296년 (즉 1963)년 5월 15일'이고, '배성관(裵聖寬)이 근립(謹立) 왜 두줄로 명문을 새겼는지, 그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은 듯 한데... 배성관 (이순우 선생의 글에서 발췌) 그렇다면 '배성관'이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할 테지만, 알고 봤더니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깨나 날렸던 골동상이었다. 이 계통에서는 '명물', '괴짜', '기인'이라는 호칭으로도 통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신문자료를 뒤지다가 진작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골동상을 전전하던 신라시대 사리탑, 수만 원짜리를 기백 원에 팔어, 총독부서 국보지정"이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괴산 외사리 사지 외사리사지 부도...간송미술관 신라시대의 풍치좋은 사리탑을 불과 수백 원에 전전매매 중 발견한 국보가 있다. 부내 남대문통 고물상 배성관(裵聖寬)이가 지난 6월 27일경 용인군에 거주하는 김성배(金聖培)의 중개로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忠北 槐山郡 七星面 外沙里) 349번지 김준형(金俊衡)으로부터 높이 1장2척 가량되는 사리탑 한 개를 350원을 주고 사서 부내 황금정 2정목 타케우치(竹內)모에게 2천7백 원에 전매를 하였는데 타케우치 모씨는 수만 원의 가격이 있는 보물인 것을 알고 다시 지나(支那)방면에 전매하고자 하는 것을 총독부 사회과에서 탐지하고 지난 3일 오전 10시경 사회과 최속(崔屬)과 아리미츠(有光) 사와(澤) 속 등이 본정서(本町署) 니시자키(西崎) 보안주임과 같이 현장 사리탑을 조사한 후 10일 보물가지정(寶物假指定)을 하여 보관케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충북 괴산에 있던 어느 '석조부도'를 무단반출한 장본인이 바로 배성관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그의 나이가 50대를 넘어선 상태였으므로 이미 골동상으로서도 상당한 경력과 연륜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50원 짜리로 사들인 것을 불과 며칠 사이에 10배 가까운 2천 7백 원의 가격으로 다시 일본인 골동상에게 떠넘긴 걸 보면 골동품을 사고 파는 솜씨도 꽤나 상당했던 것 같다.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 (관음리 관음사가 본래위치) 이 사건으로 인해 골동상 배성관이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차례 고적유물의 밀반출에 연루되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가령 1935년 8월에 발생한 경북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에 있던 오층석탑의 불법거래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가 비록 이 사건의 주모자는 아니었지만 밀반출된 석탑을 처분하는 거래선의 하나였던 걸 보면, 그의 활동범위가 어떠했는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월간 문화재> 1973년 7·8월호에 수록된 이영섭 선생의 연재물 "문화재비화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6) 기인 골동상 배성관"에는 그의 면모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1947년경 이야기. 우리 나라 국보 제1호 숭례문을 들어서서 동대문 가는 전차길을 따라 소란스러운 남대문거리를 3, 4분 걸어가면 한국은행 못미처 대로변에 즐비한 번화한 점포들과는 대조적으로 온갖 골동 고물 잡동사니 할 것 없이 보기에도 너절한 물건들을 담프트럭으로 몇 차 실어다가 상점 안에다 무더기로 콱 부려놓은 것 같이 쌓여 있는 골동가게가 있었다.
벽이나 천장 할 것 없이 금세 벗겨 말린 노루가죽이니 알지 못할 짐승의 뼈다귀 기외(其外) 이름조차 모를 지저분한 물건들이 동굴 속에 매달린 박쥐 모양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도 기관(奇觀)이었지만 도대체 땅값 비싼 서울 장안 한복판에 이런 상점이 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런 상점에서 물건을 사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은 우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주인이라는 사람은 18세게 김홍도풍속화에서 금세 빠져 나온 것 같은 허수룩한 상투쟁이에 팔자수염의 노루같이 마른 반백(半白)의 노인인데 언제 지나며 보아도 나를 좀 보아달라는 듯이 상점 앞에 쪼그리고 않아서 거리를 오고가는 20세기 사람들을 한사람 빠트리지 않으려는 듯이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 상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나 일정시(日政時)에도 서울에 몇집 안되는 한국사람 골동상인으로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주식회사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의 주주이기도 하였지만 일본상인 간에도 '하이세이칸'이니 '쵸무마게상'(상투쟁이)으로 통하여 심심치않게 화제에도 오르락내리락한 주인공이다. 일본말 아는 것은 '하이'(네) 소리뿐이었다고 하나 장삿길에 있어서는 일본말 잘하는 사람 찜쪄 먹게 실속 차리는 서울의 명물노인 배성관씨가 바로 이 사람이다. 다시 <월간 문화재> 1973년 7·8월호에 수록된 이영섭 선생의 연재물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인다.
이북공산군의 남침에 의한 6.25 사변은 이땅에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가지가지의 비극과 상처를 남기고야 말았지만 남대문로 3가 100번지에 살고 있던 배성관 노인의 가정에도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운명의 신은 무자비하였으며 너무나 큰 상처를 그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유엔군의 포격이 심해지자 배노인 내외는 육남매 자녀를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다는 것이 근방 벽돌 2층집 구 상반(常盤, 도끼와)여관 지하실에 숨겨두었는데 직격탄이 터지는 바람에 불행히도 고스란히 아까운 어린 생명들을 한꺼번에 앗아가버리고 마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층점포도 순식간에 화염에 싸여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엉겁결에 들고 나온 도금불상 두 점과 서화 한 뭉치밖에 없었으며 이 비극 앞에 무력한 그는 땅이 꺼져라하고 발을 동동 굴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슬픈 생각가운데도 세월은 흘렀다. 외환은행이 생기며 그의 집터는 5000만 환에 팔렸으며 그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6.25때 잃어버린 육남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서울 근교 봉원사(奉元寺)에 불당과 석불을 세우고 거액을 기증하였으며 불도(佛道)에 귀의하여 그 절에서 기거한다고 얘기 들었다. 드디어 그의 심경에는 크나큰 변화가 생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6.25사변 때 전화로 집을 홀랑 태워버리고 육남매를 잃은 후에는 그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후 내가 배성관 노인을 인사동 네거리에서 만난 것은 1962년 맑게 개인 어떤 가을날이었다. 너무나도 변한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어쩌면 인생의 무상함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가 일평생을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상투'도 없어지고 면도로 밀었는지 스님의 머리모양 반들반들하다. 평생 영광의 면류관으로 생각하고 있던 백발의 관을 미련없이 벗어버린 것이다. 확실히 서울의 이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입고 있는 옷도 스님옷 비슷한 것을 보면 그는 속세의 때묻은 물욕(物慾)과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훨훨 몸에서 벗어버리고 인생의 본향을 향하여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천만 환이라는 돈은 그 당시 거액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가 그렇게 생명같이 아끼던 '돈' 가지고도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결국 한국전쟁으로 자식을 몽땅 잃어버린 끝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알고 보니 '제일강산 태평세계'도 그 자신의 염원과 심정을 역설적으로 토로한 구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주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일로 그가 너무도 세상살이에 달관한 탓인지, 그가 가진 많은 것을 여기저기에 기증하거나 사찰에다 시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위의 글에서 나오듯이 그는 거액을 희사하여 봉원사에 불상을 세웠으며, 특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도 상당수의 군사관련유물을 기증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월간 문화재> 1973년 9월호에 수록된 이강칠 선생의 "군사유물수집의 독지가 배성관(裵聖寬)씨"라는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길 보면 배성관 노인은 1959년 7월부터 1968년 4월에 이르기까지 모두 92점의 유물을 기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연령군신도비(延齡君 神道碑,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3호)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 괴짜 골동상의 기증에 따른 일이었다. 이에 관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64년도 가을에 배씨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는 사진 2매를 내어놓으며 이것을 옮겨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는 곧 연령군의 신도비인데 이를 자기가 구입한 것이나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차례 현지답사를 하여 현물을 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돌아온 후 현지조사와 관계기관에 조회한 결과 이는 영등포구 대방국민학교 교정 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신도비였다. 이는 근세조선 제19대왕인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의 신도비인데 그는 동왕 25(1699)년에 나서 종친부당상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던 중 동왕 45(1718)년 21세 젊은 나이로 요사(夭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은 그곳에 장사하게 하고 그 다음해에 그 비를 건립하게 하였다. 그 후 1940년 그 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이장하였고 그 비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를 지닌 이 신도비라 배씨는 어떠한 절차로 매입하였는지는 불문하고 모든 조사를 완료한 후 마침 1967년 5월 삼군부청사를 사용한 바 있는 청헌당(淸憲堂)을 이건하여 군사박물관 고대관(古代館)으로 사용하게 되자 동 신도비도 이건할 것을 배씨와 우선 의론하고 모든 수속을 완료하여 문교부장관에게 상신하였던 바 동년 6월 14일자로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중장비를 동원하여 현지에 이르러 작업을 실시하니 인근노인들의 노여움이 대단하였다. 그 이유인즉 이 비는 건립 이래 이 고장을 지켜주었고 도한 믿음의 대상이었다 한다. 또한 그 규모로 보아 그 장비로는 불가하니 공연히 상하게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당시 그곳 관계기관과 전후사실을 설명하고 승인된 서류를 제시하고 협의한 후 노인들에게는 간곡한 설명과 이해를 시킨 후 작업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이수와 비신은 이동이 완료되었으나 하부 귀호(龜毫, 귀부)를 이동하기에는 불가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모부대를 방문하여 의뢰하였던 바 쾌히 승낙을 받고 결과적으로 이동은 완료하였으나 이동작업이 완료되고 지표석(地標石)을 세운 후 관계기관에 이전결과보고를 하기는 동년 8월 16일자로 제출하였으니 약 2개월여가 소요되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던 골동상 배성관 노인이 뒤늦게 '제일강산 태평세계' 비석까지 새겨서 세상사람들에게 남겨놓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혹여 그것이 제 자신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이 땅의 문화재에 대한 속죄의 표시는 아니었을까?
(정리 : 2005.4.2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동국대 박물관 답사 동선에 꼭 수표교.장충단비.제일강산비를 포함시켜 한말과 일제강점기.근세에 이르는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2019.12.06 |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연복사 탑 중창비 (0) | 2020.11.15 |
---|---|
서울...신사동 석탑 (0) | 2019.12.17 |
서울...동국대박물관 실내전시장 (0) | 2019.12.16 |
서울...동국대박물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0) | 2019.12.16 |
서울...경희대 중앙박물관 (0) | 2019.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