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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서산시

서산...상왕산 개심사

by 임병기(선과) 2019.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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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서너번 순례한 기억이 있는데 2004년 글만 있습니다.

부도전 사진 촬영을 위해서 동선에 포함하였는데, 오늘 들리지 았다면 개심사 사진 한 장 없는 초라한 옛님방이 될 뻔 하였습니다.

 

아래는 겂없이 휘갈긴 2004년 글 입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77

 

 

이른 아침

차량으로 진입 할 수도 있지만 그시절(?)을 반추하며 옛길로 접어 듭니다.

 

개심開心도 아득하고

세심洗心은 언강생심!!!

 

 

전생에 무슨 덕을 지었기에 혼자 독차지하여 누립니다.

 

 

그때(?)도 이런 장면이었을텐데...

 

 

개심사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개심사 사적기」에 의하면 “진덕여왕 5년,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서산 개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개심사 사적기」는 근현대의 기록이며, 기록 가운데 진덕여왕 5년은 651년이고, 의자왕 14년은 654년이라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개심사를 창건한 혜감이 국사라 했는데 국사 제도는 백제에 보이지 않고 있다. 혜감국사가 개심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고려 후기 웅진 출신의 수선사 제10세조였던 혜감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심사 사적기」에 의하면 쇠락한 개심사를 1350년(충정왕 2)에 처능이 중건하고 절 이름을 개심사라고 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고려 때 폐사된 개심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다시 나타나므로 언젠가 다시 중창된 것으로 보이며,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하면 1475년(성종 6) 충청도절도사 김서형이 사냥을 위해 산에 불을 놓아 다시 대웅전이 소실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여현(韓汝賢)이 지은 서산의 사찬읍지(私撰邑誌)인『호산록(湖山錄)』(1619)에 의하면 개심사는 이미 폐사되어 수풀이 무성하고 절 뒤편에 지은 3칸 자리 부도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75년(성종 6)에 불탄 대웅전이 9년 뒤인 1484년(성종 15)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근현대에는 침체된 불교계를 진흥시키고 새로운 선풍을 진작한 승려 경허(鏡虛)가 잠시 머물렀다고 하며, 1955년에 전면 보수하였고, 1983년 2월 28일에 전통 사찰 제38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무량수각, 심검당, 안양루, 명부전, 팔상전, 범종각, 오층 석탑, 「개심사 영산회괘불탱」 등이 있다, 대웅전 후불벽에는 1676년 조성된 관경변상도의 후불탱화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근래에 도난당하였다. 대웅전에는 보통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 개심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1676년 조성된 관경변상도가 보통 아미타삼존불의 후불탱화로 그려진 점을 감안한다면 원래 전각의 이름이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에서 후대 대웅전으로 바뀐 것으로 추측된다. 대웅전 왼쪽 벽면에는 1887년(고종 24)에 선옥, 능호 등의 화사가 그린 칠성탱이 있다."

(디지털 서산문화대전에서 발췌)

 

 

경지鏡池

잡스런 내모습이 노출되는 듯.

훗날 시왕 앞 업경대에 비쳐질 내모습을 미리 떠올려 봅니다.

착하게 살았던가?

 

 

석탑 옥개석

일전에 우리카페 우성님이 사찰 순례 후 알려준 부재 입니다.

 

그리고

하루 뒤 동호회 예산 답사에서 이기웅님에게 정확한 내력을 들었습니다.

가야산 적조암지에 있었던 부재이며 다른 장소에  동일석탑  부재도 유존하여 한차례 복원 문제를 협의하였으나 유야무야되었다고 합니다.

 

적조암지寂照庵址

1753년 이철환의 상산삼매에는 적조암은 무너진 전각을 근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였고 지장보살을 모셨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즉, 18세기 말에도 향화를 피운 사찰이었습니다.

 

 

 

뒤집힌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절수구 표현, 4단 층급받침, 전각의 반전은 경쾌합니다.

2단 탑신 굄을 조출하였고 현수곡선이 나타납니다.

11~12세기의 고려 석탑부재로 생각 됩니다.

 

 

현수곡선

 

 

2단 굄

 

 

4단 층급받침.

절수구

 

 

개심사...목필균

 

코끼리 닮았다는 상왕산(象王山)

호젓한 숲길로 쉬엄쉬엄 오르면

마음 열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개심사가 있다

 

도량 앞 연못가에는

해묵은 배롱나무가 붉은 꽃으로

복닥거리는 세상에 빗장을 지르지만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해탈문 들어가서도

허물 많은 죄업은 접어두고

소원성취, 건강기원, 복만 달라는 사람들

 

연꽃 위에 앉아있는 아미타부처님 곁에

지장보살부처님도 관세음보살부처님도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으니

 

찰나 같은 이승에서

탐욕을 버리고, 자비심을 베풀며

참다운 나를 찾아가라 한다

 

 

상왕산개심사(寺)

안양루 전면에 걸린 현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해강() 김규진(, 1868~1933년)의 글씨 입니다.

 

 

안양루

누하진입이 아니라 우회하여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 갑니다.

어느 책에선가 백제계 산지 사찰에서 나타나는 진입 공간이라는글을 읽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안양루

그렇다면 대웅보전은 후대에 바뀐 현판 일까요?

 

 

해탈문(門)

안양루를 우회하여 대웅전구역으로 진입하는 문 입니다.

 

 

휴당(休堂) 이계봉(李啓鳳)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대웅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651년(진덕여왕5년)에 창건, 1484년)에 중창되었다. 구조는 다포() 계통과 주심포() 계통의 기법을 혼합한 절충식이다. 건물의 전후면에서 보면 처마 밑의 공포()는 다포집 계통이며 외부는 2출목(), 내부는 3출목으로 공간포()는 기둥 사이마다 2개씩 배치하였다.

외부 공포의 첨차 끝에 달린 쇠서는 2개의 앙설()뿐이며, 건물의 옆면은 다포집 건축에서는 보기드문 맞배지붕 형식으로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종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1941년 해체·중수 공사를 하였을 때, 중앙 마룻도리를 받친 장여에서 “…”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성화 20년은 조선 성종 15년(1484년)에 해당한다."(출처.두산백과사전에서 발췌)

 

기단

괘불지주

 

 

목조아미타불좌상(본존) 阿彌陀佛坐像(本尊)

 

개금 묵서명(지원 17(1280)년)

“지원십칠년경진십일월() 십사일별립승재색() 수보개심사당주() 무량수여래() 법회() 김▣백□(□) 내시시흥위위장사송(□) □□□내시별잡□박□(□□□□)”로 읽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이 아미타불좌상이 충렬왕 6년인 1280년에 보수되었고 개심사 금당의 주존()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사()의 주체는 승재색()이라는 임시로 설치된 기관으로 경전의 간행, 사찰의 중수, 불상의 개금과 보수, 불교 재의() 등을 담당하던 관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개심사 아미타여래상의 보수를 담당하였던 인물은 내시()이자 중앙군단 흥위위()의 장사()라는 직위를 가진 송씨() 성()의 인물과 그 휘하의 무관들이었다고 생각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존불은 개금묵서를 통해 고려후기(1280년)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으며, 협시보살인 지장과 관음보살 입상은 후대에 봉안된 보살상으로 전합니다.

 

 

후불벽화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

모사본 같습니다.

 

 

개심사 오층석탑

기단부가 헷갈립니다.

 

 

이층기단?

복판복련석은 하층기단이 망실된 굄

복련부재 아래는 2단 지대석

 

단층기단?

지대석위에 복련 굄

이런 작례는 없고...

 

달넘새님께 자문을 구했더니

복련은 불대좌형 석탑의 하대석이며, 갑석은 앙련이 생략된 불대좌형 석탑의 상대석이라고 설명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석탑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선시대 석탑으로 비정하였습니다.

 

 

갑석 하부

부연을 깊고 얕게 표현하였고,

중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으며, 감입식으로 결구하였습니다

 

 

갑석 상부

약간의 물매가 있고, 3단 굄을 조출

 

 

탑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습니다.

 

 

옥개석

전각의 반전이 급격

절수구가 넓으며, 층급받침은 전층 3단, 상부에 1단 굄을 조출하였습니다.

 

 

절수구.층급받침

 

 

 

상륜부

노반과 일석인 앙화(노반 귀꽃?)와 보주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비지정이군요?

지정,비지정으로 문화재의 가치를 논 할 수 없지만 의외 입니다.

 

연세가 몇인데...

 

 

무량수각無量壽閣

심검당 맞은 편에 위치.

내부에 보고싶은 탱화가 있지만 비공개로 스님들의 승방 입니다.

 

 

 

무량수각 후면

 

 

무량수각 기둥

 

 

심검당尋劍堂

요사이며 굽은 목재가 답사객들에게 회자되는 입니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 3중창했고 영조 때까지 6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합니다.

 

 

심검당

 

 

명부전

옛인연으로 남아 있지만 겹벚꽃이 만개한 봄날에  다시 인연을 짓겠습니다.

 

 

상부도전

당호를 새기지 않은 3기의 조선후기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1)

 

 

 

 

 

 

 

부도(2)

 

 

 

 

부도(3)

기단과 탑신석이 일석 입니다.

 

 

 

 

 

팔각 석주

 

 

 

하부도전

최근의 부도 4기와 조선후기 부도 3기

 

 

 

 

 

 

 

OOO당대선사 성연지탑(OOO堂 大禪師 省演之塔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탑신석은 4면을 깍아내어 방형처럼 보입니다.

 

 

 

 

 

 

정연(?)당대선사지탑(睈淵大禪師之塔)

 

 

 

 

 

 

 

 

예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도도 뵈었지만 은퇴하면 가야산 폐사지와 더불어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그때는 부도 주인공의 행장을 알 수 있을는지...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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