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옥산서원

임병기(선과) 2019. 10. 2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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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13일 '세계문화유산 답사와 천문관측'을 주제로 하는 팸투어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을 기리는 서원으로 회재는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 유학을 대표하는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적 제154호.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암수재(闇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구인당 안 대청마루에는 한호(韓濩)가 쓴 '구인당'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이 국보 제322-1호로, 이언적의 수필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1513년 간행된 활자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海東名蹟)〉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다음 백과 사전) 

 

 

하마비

무변루 반대편 자계천 제방둑에 위치하여, 예전 진입 동선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으로 향하는 다리


예전에는 돌다리 아니었을까요?

회재는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에 이르는 자계천 바위에 이른바 5대라고 알려진 이름을 붙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고픈 심성을 보여줍니다.


오대五臺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


 

세심대洗心臺

퇴계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라는 뜻입니다.

정조 재위시 세심대 너럭바위에서 사마시를 치루기도  했다고 합니다.

 

 

용추龍湫 각자

 

 

상류에 댐이 없을때는 깊이와 유량이 깊고 풍부했을듯 합니다.


 

역락문(亦樂門))

옥산서원 외삼문 입니다. 


논어 학이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액찬額贊

聞風則回 望道而來 不亦樂哉 邦之英才(문풍칙회 망도이래 불역락재 방지영재)

풍문을 듣고 돌아오며, 도(道)를 바라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나라의 英才들이여

역락재는 한석봉의 글씨이며

옥산서원 모든 현판의 액찬은 회재의 제자인 노수신의 글로 전합니다.


노수신盧守愼(1515 ∼1590)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다음백과사전에서 발췌)


 아래는 2003년 나의 답사기중에서...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를 들으서면서 잠시 옛기억에 사로잡힌다.
고교시절 무애 양주동 박사의 학문의 즐거움이란 글을 접하면서 맹자의 인생삼락과 더불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문장 중의 하나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였다.

 

영문학자 출신이었으나 일본인에 의해서 연구된 신라향가를 보고 전공을 포기하고 향가 연구에 일생을 바친 무애선생을 시간을 건너 뛰어 다시 뵐수 있다니 이것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자칭 국보라 말하며 거침이 없는 분이었으나 신혼 여행을 가면서 사모님께 평생 당신을 사랑하겠으며,자기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날 저녁 투숙한 숙소에 불이나자 혼자 도망을 나온 죄 땜에 평생을 사모님께 큰소리 치지 못하고 잡혀사신다고 너털 웃음을 짓던 무애 선생이 더욱 그리운 것은 퇴색되어가는 우리글의 현실 때문일까?

 

 

무변루無邊樓

정면 7칸 건물이며 위층 중앙 3칸은 대청,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온돌방이며  좌우 각 한 칸에 덧붙인 누마루를 배치하였습니다.

 


누마루.정면 판문

 


누마루와 누하주

 


누마루와 누하주

 


2층온돌방 측면, 1층 아궁이

 


2층 계자 난간과 통나무 계단

 

 

무변루無邊樓

한석봉 글씨

원래 납청루(納淸樓)이었으나 노수신(盧守愼)이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취하여 다시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무변루 액찬 無邊樓 額讚

노수신 글

靡欠靡餘 罔終罔初 光歟霽歟 游于太虛 미흠미여 망종망초 광여제여 유우태허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


"조선의 유학자. 성리학의 이설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 호는 회재·자계옹.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9년(선조2)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573년(선조6) 경주에 건립된 독락당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왕명으로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고 사액이 편액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시호(諡號) 는 문원(文元)이다.


사상과 저술

           

이언적의 태극론은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였던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을 비판한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와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4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주자(朱子)의 이기론의 주리론(主理論)적 견해를 수용하여 두 사람을 비판하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했다.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는 태극개념논쟁 과정 속에서 전개된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주요한 저술들을 많이 남겼다. 즉 1549년 저술된 〈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에서는 주자의 격물치지보망장을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經) 1장에 들어 있는 2절(二節)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기려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자의 일자일구(一字一句)의 수정보완도 주저하던 조선시대 학문태도에서 벗어난 매우 창의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1550년에는 〈구인록(求仁錄)〉·〈봉선잡의(奉先雜儀)〉를 저술했다. 〈구인록〉에는 유교의 핵심적 개념인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이 나타나 있고, 〈봉선잡의〉는 주자의 〈가례(家禮)〉를 참조하여 당시 사정에 맞게 재구성한 것으로 조선 후기 예학파(禮學派)의 선구가 되었다.


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는 그의 미완성 절필(絶筆)로 주자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구경을 중심으로 중용정신을 밝힌 저술이다. 그밖의 저서로는 <속대학혹문 續大學或問〉·〈관서문답록 關西問答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회재집 晦齋集〉이 있다."(다음 백과사전)

 


옥산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 서원배치이지만 강학공간인 구인당 동서재 무변루가 아주 폐쇄적인 분위기 입니다.

이를 두고 현장에서도 여러 해석이 있었으나 개인적인 견해는 오픈된 공간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정료대

사찰 팔각 석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팔각 하대석, 간주석, 앙련과 화심, 간엽을 표현한 상대석으로 구성

 

 

상대석


 


동재東齋

 


민구재(敏求齋)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에서 취하였으며, 인을 구함에 있어 민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서재西齋 

 


암수재(闇修齋)

암연자수(闇然自修)에서 취하였으며, 조용히 스스로 닦는다는 자수(自修)의 의미라고 합니다. 

 

 

관리사

 


구인당求仁堂

강학공간 입니다.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5칸 건물, 중앙 3칸 마루, 양협칸에는 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 입니다.

 

 

 


옥산서원 玉山書院

추사 글씨

 


만력갑술사액후260년기해실화개서 선사(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賜)

1574년(선조 7) 사액 후 266년이 지난 기해년(1839)에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돼 중건하면서 다시 써서 왕(헌종)이 하사한 편액이라는 내용입니다

 


구인당求仁堂

한석봉 글씨
구인求仁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으로 성현의 학문이 오로지 인仁을 구求하는데 있다는 이언적의 성리학의 핵심사상을 의미합니다.

 


액찬額讚

노수신의 글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 卽此是本 심덕하손 방이왈원 일념지반즉차시본
마음의 덕이 어찌 줄어들겠는가? 놓아두고서 왈, 멀다 한다. 한 번 생각하여 돌이킬 줄 알면 곧 이것이 바로 근본이다

 

 

양진재(兩進齋). 구인당동협실

한석봉 글씨

중용 성자진실무망지위 천리지본연야(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에서 취함
양진兩進은 명明(도덕을 밝힌다)과 성誠(의지를 성실하게 한다)을 갖추어 전진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액찬額讚

노수신 글씨

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  택선유명 반신유성 숙중숙경 성현동행
선을 택함은 밝아야 하고 자신을 반성함은 성실하게 하여야 하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 성인과 현인이 함께 해야한다

 


해립재(偕立齋).구인당 서협실
偕立(해립)은 경의해립敬義偕立에서 취함.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은 성리학의 으뜸이 되는 뜻이라고 합니다.


액찬 額讚

노수신 글
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弗忘 天德之光  경직의방 내외교상 유조불망 천덕지광
경은 바르고 의는 방정하니 안과 밖이 서로 교섭한다. 오직 이것을 붙잡아서 잊지 않으면 천덕이 빛나리라

 


구인당 후면



경각 經閣

 


신도비각

 


신도비.1577년

기대승이 찬하고,이산해의 글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아래 해석을 보면  행장과 비문을 이퇴계에게 부탁하였으나 퇴계는 비문을 기대승에게 넘겼습니다.

나이를 극복하고 두 사람간에 주고 받은 학문적 논쟁을 떠나 상대를 이해해주는 아름다운 교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래 신도비문 해석은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가져왔습니다.


조선국 의정부 좌찬성 증 영의정 문원공 회재 이선생 신도비명(朝鮮國 議政府左贊成 贈領議政 文元公 李先生 神道碑) 병서(竝序) [전액(篆額)]

유명조선국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지경연춘추관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중감사 시문원 회재선생 이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知經筵春秋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衆監事 諡文元 晦齋先生 李公 神道碑銘 幷序)
통정대부 전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기대승 찬(通政大夫 前成均館大司成 知製敎 奇大升 撰)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 지제교 이산해 서(通政大夫 司諫院大司諫 知製敎 李山海 書)


명종의 재위 20년(1565년)에 권간(權奸)들을 방출(放黜)하고 정사를 크게 변경하시고는, 나이 많은 노성(老成)한 분과 준걸(俊傑)들을 맞이하여 등용하고, 죄를 입고 과오를 범한 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셨다. 을사년(을사사화) 이후로 귀양가거나 쫓겨난 자들을 혹은 서용(敍用)하고 혹은 전직하셨으며, 이미 죽은 자들은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고 의정부 좌찬성 회재(晦齋) 이공은 올곧은 도를 행하다가 배척을 입고서 별세하신 지가 13년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복관(復官)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세도(世道)는 태평성세를 만나 훌륭한 정치가 날로 새로워져서 이 수년간에 나쁜 짓을 깨끗이 씻어내고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쓰는 일이 진실로 장차 극진하게 되었거늘, 하늘에서 재앙을 내리어 명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니, 신민의 애통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금상께서는 즉위하신 초년에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시어 지극한 도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나자, 맨 먼저 크나큰 은혜를 내려 아직 다 풀려나지 않은 자들을 모두 풀어주고 관원으로 임용하신 다음,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당세의 일을 더욱 자문하셨다. 이때에 선비들 가운데 제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마음속에 억눌림이 있었던 자들이 모두 머리를 들고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여, 숨겨져 있던 사실들을 진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공의 훌륭한 도덕과 문장도 또한 임금님 아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생의 유서(遺書)를 찾아 수집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얼마 후에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또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아! 공의 도(道)가 이제는 한 세상에 다소나마 알려지게 되었도다.


공의 휘(諱)는 언적(彦迪)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며,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인데, 중종께서 언(彦) 자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선계(先系)는 여주(驪州)에서 나왔는데, 그 후 경주(慶州)의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증조의 휘는 숭례(崇禮)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수회(壽會)로,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번(蕃)으로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 손씨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시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아홉 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차츰 자라면서 학문에 힘쓰고 문장을 잘하였다. 정덕(正德,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계유년(중종 8, 151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다음해인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으로 교서관 부정자가 되었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저작(著作)에 이르렀다. 할아버지인 참군공(參軍公)이 별세하자, 공은 승중(承重)으로서 상을 마쳤다. 그 후 박사로 승진되고 홍문관 박사와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 이조좌랑으로 옮겼다. 외직(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여 인동현감(仁同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겨우 2년 만에 불려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병조정랑과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문학(文學)으로 옮겼다가 장령(掌令)과 보덕(輔德)이 되었다.


가정(嘉靖) 기축년(중종 24, 1529년)에 밀양부사로 나갔다. 백성을 대하고 아전들을 다스림에 모두 조리와 법도가 있어서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사랑하였다. 1년 남짓 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소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김안로(金安老) 를 끌어들여 동궁(東宮)을 우익(羽翼)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동궁과 친하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제창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고,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등이 부화뇌동하니, 온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 공은 홀로 그 불가함을 강력히 말하여, 채무택과 의견이 합하지 못하였다. 이에 채무택은 정언(正言)에서 체직되었는데, 바깥 의논들은 공이 딴 의견을 세운다고 비방하여 공도 사예(司藝)로 체직되었다.


심언광(沈彦光)이 공에게 “사예(司藝)는 어찌해서 김아무개가 소인임을 아는가?” 하고 물었다. 이공은 “김안로가 동경부윤(東京府尹)이었을 때 그의 처신과 행사를 보니 참으로 소인이었다.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국가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김안로가 비록 조정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찌 그에게 큰 권력을 주겠는가? 다만 동궁을 위하여 배려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사람들이 만일 들어오면 반드시 국정을 잡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누가 감히 막겠는가? 또 동궁은 한 나라의 신민들이 함께 촉망하는 바인데 어찌 김안로가 있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지 심언광은 노하여 가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공을 탄핵하였다. 그래서 공은 파직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 7년 만에 김안로가 패하여 죽자, 상께서는 공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불러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하였다. 그 후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의정부 검상으로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겼으며,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승진하였다.


무신년(명종 3, 1548년) 겨울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년 만에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공은 비록 요양을 위해서 외직을 청하기는 하였으나, 국가를 걱정하는 생각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침 재이(災異)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자, 공은 마침내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 말한 바가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시무(時務)를 조처하는 내용으로서, 임금에게 아뢰고 도모한 것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상은 칭찬과 감탄을 깊이 하시고 명하여 동궁 및 바깥 조정에게 돌려보게 하였으며, 공의 직급을 승진시켰다.


얼마 후 병조참판 겸세자우부빈객(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에 임명되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나의 말씀을 받아주시니 이것은 다행이지만 끝내 지나친 상이 내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바이다.” 하시고, 전문(箋文)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후 예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자, 다시 상소하여 성학(聖學)의 본말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구 아뢰었다.


신축년(명종 5, 1550년) 겨울에는 자헌대부로 승진되고,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이 되었다. 얼마 후 정헌대부로 올라 의정부우참찬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그 후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로 전직되고 다시 대사헌과 우참찬이 되었다. 안동부사로 나갈 것을 청했으나, 사간원에서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자, 그로 인하여 의정부참찬 겸홍문관제학(兼弘文館提學)을 맡았다.


공은 모부인(母夫人)께서 노환을 앓으셨기 때문에 멀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고 여러 번 돌아가 봉양하게 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위로하시되, 윤허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공은 더욱 황공하여 외직을 더욱 강력히 청하여 마침내 경상도 감사로 나갔다.


갑진년(중종 39, 1544) 8월에는 한성판윤 겸좌부빈객에 제수되었으나, 마침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불러 우찬성에 임명하였고, 좌찬성 겸지경연사로 전직되었다. 공은 병으로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특지를 내려 돈독히 효유하고, 이어서 의약품을 하사하였다. 공은 다시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병이 차도가 있자, 그제야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공은 두 조정(중종ㆍ인종)의 융숭한 예우에 감동되어 스스로 힘을 내어 한번 가려고 하였다. 대개 국가를 위해 일할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종께서 병환이 오래되어 국가의 걱정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공은 사석(私席)에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말씀하기를 “지금 주상께서는 후사(後嗣)가 없고 대군은 나이가 어리니, 어찌 일찌감치 건백(建白)하여 대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해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윤인경은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따르지 못하였다.


을사년 7월 인종께서 승하하시자, 명종은 순서를 이어 즉위하고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백관 회의에서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계시니, 어느 전(殿)에서 수렴청정을 하여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좌우의 신하들은 묵묵히 있었다. 이때 공이 말씀하기를 “옛날 송나라 철종(哲宗) 때에 태황태후(太皇太后)가 함께 수렴청정하였다. 이러한 옛날 규례가 있으니, 굳이 의심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에는 다만 수렴하는 의식을 정하면 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논이 정해졌다.


8월에 의정부에서 열 가지 조항을 써 올렸다. 첫째, “자전(慈殿)께서는 성상(聖上)의 자질을 잘 인도하고 길러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둘째, “경연관을 널리 뽑아 항상 성상과 더불어 강론하고 자문해서 성학(聖學)을 성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셋째, “전하께서는 대행왕(大行王, 돌아가신 전왕. 여기서는 인종)에 대하여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신하로서의 도리가 있으므로 상례(喪禮)에 있어 정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청하였다. 넷째, “궁중을 엄격히 하고 외척을 방비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다섯째, “궁인을 신중하게 가려 뽑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여섯째, “특지(特旨)를 쓰지 마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일곱째, “판부(判付)를 쓰지 마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여덟째, “승정원의 직책은 왕명의 출납을 오로지 신실하게 하여, 내지(內旨)에 합당하지 못함이 있으면 함봉하여 반환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아홉째, “궁중(宮中)과 부중(府中, 조정)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 하므로 사문(私門)을 열지 말아서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열째, “대행왕은 학문의 효험으로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져 사람들이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승하하시고 금상께서 뒤를 이으셨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지금 막 대행왕에게 기대하던 것을 가지고 전하에게 기대하고 있는바, 그 기관(機關)이 매우 중요하므로 양전(兩殿)께서는 유념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당초에 윤원형(尹元衡)은윤임(尹任)과 원한 관계가 이미 깊었는데, 임백령(林百齡) 과 이기(李芑)는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사림(士林)들을 전복시켜서 자기의 간사한 꾀를 이루려고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고 칭탁하고 대간(臺諫)을 유인하여 윤임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간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이기 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 아뢸 일이 있다 하였다. 양전(兩殿)이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납시자, 재추(宰樞)들을 들어오게 하여 장차 윤임 등에게 죄를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대비의 노여움이 진동하여 사람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은 침착하게 말씀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바, 그때에 저들이 대행왕에게 마음을 다한 것을 지금에 어찌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또 거사(擧事)는 분명히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죄에 걸릴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 목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이기 등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하고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 이름하였으며, 이날 입시한 재추들을 함께 공신으로 기록하였다. 공 역시 이에 끼이게 되었다. 공은 이것을 강력히 사양하며 “어찌 공이 없이 외람되게 상을 받아서 국가의 법을 문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병오년(명종 원년, 1546년) 봄에 공은 차자(箚子)를 올려 이렇게 말씀하였다. “선현들의 말씀에, 임금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직책에 있습니다만, 직책을 제대로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삼가 선현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 중에서 성상의 덕에 보탬이 있고 오늘날에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발췌하여 조목조목 기록하여 올립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깊이 믿고 힘써 행하신다면, 이것이 성공(聖功)에 도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얼마 후 장차 어버이를 문안하기 위하여 가면서 또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히며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고 간신을 멀리 할 것을 청하였다.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깊고 간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한 자들과는 마치 빙탄(氷炭) 같은 형세라서 서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해서, 체직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수개월 후에 이기가 공을 모함하여 아뢰기를, “이언적은 일찍이 세자(인종을 가리킴)에게 아첨하여 붙고, 중종을 배반하였습니다. 서계(書啓)한 열 가지 조항은 임금의 손과 발을 묶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인숙(柳仁淑) 등과 결탁하여 역적들을 구원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이언적은 신에게 은혜가 있지만, 신은 이제 국가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그러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뒤를 이어 논박하였다. 마침내 공의 공훈과 관작을 삭탈하였다.


정미년 9월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을사사화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가하자, 공 역시 강계부(江界府)로 안치되었다. 집식구들은 선생을 귀양보낸다는 명령을 듣고 서로 울부짖었으나, 공은 태연하여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집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대부인을 잘 봉양하라. 황천(皇天)이 계시니, 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다음해 대부인께서 별세하시자, 공은 대부인이 남긴 의복을 가지고 신위(神位)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 몸이 수척해질 정도가 되어서 삼년상을 다하였다.


공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지어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공부하고 저녁에서도 두려워하듯 신중한 태도를 이어나갔다. 책상에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붙여, “나는 매일 내 몸을 세 가지로 반성한다. 하늘을 섬김에 있어서 미진함이 있었는가? 임금과 어버이를 위하여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짐에 있어서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왕명을 띠고 온 관원이 급히 말을 몰아 성으로 들어오자, 온 부중(府中)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바르게 앉아 책을 보았다. 죽고 사는 것을 한결같이 보아 평소의 조행(操行)을 바꾸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명종 8, 1553년) 11월 을축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은 63세였다. 다음해인 갑인년 봄에 경주(慶州)로반친(反櫬) 하였고, 12월 갑진일에 흥해군(興海郡) 남쪽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보다 앞서 공의 선부군(先府君)께서는 일찍이 유학자로 세상에 알려졌고, 본도(本道)의 하과(夏課)에 장원하였다. 성종께서는 그 사부(詞賦)를 가상히 여겨 불러 보시고는 의복과 물건을 하사하고, 이어서 국학(國學, 성균관)에 머물러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향리로 돌아가 날마다 후생을 가르침으로 일을 삼았다. 공은 비록 가정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 가업(家業)은 진실로 유래가 있었다.


모친 손 부인(孫夫人)은 어질고 지식과 사려가 있었으며, 자식을 사랑하여 가르침과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을 외숙인 사재(四宰, 의정부 우참찬) 손중돈(孫仲敦)에게 취학하게 하였고, 또 가난함을 무릅쓰고 비용을 대어서 멀고 가까운 곳에 가서 공부하게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에 가까웠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세속의 학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여, 강명하고 실천해서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의 공부에 힘을 썼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지었고, 30세에는 또 「입잠(立箴)」을 지었다. 그 말씀은 다 옛 성현들의 간절하고 요긴한 취지였다. 그리하여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省察)하며, 분노(忿怒)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며 개과천선하는 데 실제로 일삼은 바가 있었고, 빈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 속에 집을 짓고 고요히 지내면서 좌우에는 도서를 쌓아놓고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미 전일(專一)하게 하고 또 오랫동안 공부하였으므로 소견이 더욱더 도에 가까워졌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사랑과 공경이 함께 지극하였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음식을 장만하기를 또한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조를 제사할 때에는 더욱 그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인 언괄(彦适)과 우애하고 사랑하기를 아주 돈독하게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사람을 대하기를 예로써 하였다. 종족(宗族)을 어루만지고 노복을 어거함에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사람됨이 중후 단정하고 자상하며 높은 지취(志趣)가 있어 종일토록 묵묵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 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건의하고 시행한 것이 광명정대하였으며, 언론과 풍지(風旨)는 진실로 권강(勸講)에 대비하고 성덕(聖德)을 돕는 데 보탬이 있었다.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함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곧바로 나아가고 두려움이 없어, 비록 옛날의 용감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기개(氣槪)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道)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저서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晉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혹문(續或問)?이 있다. 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편수하였으나, 미처 책을 만들지 못하였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의 배위는 정경부인 박씨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신데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통(通)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지금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으로 있다. 서자 하나는 전인(全仁)이다. 딸은 한 사람이다. 전인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들을 잘 가르쳐 또한 다 훌륭하게 만들었다.공이 장례할 때에는 미처 묘도(墓道)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덕업의 빛남은 자연히 가릴 수가 없었으니, 표창하는 예전(禮典)은 실로 인심의 말래야 말 수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도는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함이 없었다. 고려 말엽으로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에는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도학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도학을 했다는 명칭을 그분들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를 상고해 볼 때에 대부분 명(明)ㆍ성(誠)의 실제 공부를 다 하지 못하였다. 후세에 칭할 때에도 또 연원(淵源)의 증거가 없어서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수가 없으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생으로 말하면 전수 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여 속에 간직한 덕이 날로 드러나 덕이 행실과 부합하였고 밝게 글로 써내어 훌륭한 말이 후세에 교훈이 되었다. 동방에서 찾아보더라도 거의 이만한 분이 있지 않다.” 이것은 공의 도학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잘 말했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사자(嗣子)인 찰방이 또 신도비문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자, 퇴계 선생께서는 성덕(盛德)을 칭찬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 하시고, 마침내 나에게 명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매우 신중히 여겼다. 그 사이에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세히 수정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퇴계 선생이 별세하시자, 찰방은 사람을 보내와서 비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하므로, 마침내 더 사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삼가 행장을 근거하고 아울러 관직을 지낸 차례를 상고하여 대강의 내용을 엮어서 위와 같이 쓰고 명문을 붙인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는 밝은 명을 내리어
사람에게 본성을 부여하셨으니,
본성의 사덕 실제의 성으로서
기질에 가리어져
본성이 이 때문에 상실되니,
배워서 돌이킨다면
본성은 하나이리라.
아, 우리 공께서는
이 나라에 태어나셔서
기운은 넓고 씩씩하며
덕은 온후하고 강하였도다.
처음부터 학문을 알아
삼가서 닦고 실천하였으며.
부지런히 뜻을 확충하고 양성하여
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셨네.
들어가서는 효도를 다하고
나가서는 충성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모두 적당하니
도는 시대의 흥륭과 쇠락에 관계하지 않았도다.
한때에는 비록 비방을 들었어도
만대에는 빛나리라,
선생의 저서를 찾아내어 칭찬하고 추증하였으며
종묘에 배향하여 양양히 강림하시니,
선왕의 뜻을
우리 임금님께서 받드신 것이네.
이 명을 새겨 무궁토록 제시하나니
우리 도는 이로써 일어나리라



귀부 전면

 


귀부 후면

 


비수의 단청

장엄과 벽사의 상징으로 추정됩니다.

 


비수 단청

 

 

 

사당

옥산서원에서 가장 높은 자리 담장 안쪽에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典祀廳이 위치


향사享祀

춘향과 추향 매년 2월과 8월 가운데 정(丁)자가 들어간 날 축시에 시작하여 2박 3일간 향사합니다.



내삼문

 


체인묘體仁廟

한석봉 글씨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액찬 額讚

노수신 글
生物之春 在我爲仁 體之以身 何不長人 생물지춘 재아이인 체지이신 하불장인
만물을 낳는 봄이 나에게 있어서는 仁이니 몸으로써 체득한다면 어찌 남을 자라게 하지 아니하겠는가?



은행

예전에는 저 나무아래서 제물을 준비하여 들고 들어 왔으나, 요즘은 동물학대라고 들고 일어나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건축.철학.사학 등등 다양한 전공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며 답사를 즐겼습니다.

일천한 지식으로 허리하학적인 멘트를 날리고 근거없는 풍수를 들먹이며 착한 일행들을 혹세무민하고, 곡학아세한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라며 함께한 여러 분들과, 특히 주관한 박중혁님, 김성후님께 감사드립니다.


답사는 情입니다.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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