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독락당

임병기(선과) 2019. 10. 27.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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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답사와 천문관측'

참신하고 독특한 주제로 10월 12일~13일 양일간 지인이 진행한 팸투어에 참가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이버에서 만나 10여년 이상 교류하고 있는 망형우忘形友들과 오랫만에 조우가 더 설레이었습니다.

이틀간 진행하였지만 첫날(독락당.옥산서원.양동마을)일정과 황룡사지에서 진행한 천문관측에만 참여 후 둘쨋날은 남산 일주 산행을하고 돌아왔습니다. 일본을 관통하는 대형 태풍의 영향으로 보름달 관측은 쉽지 않았지만 이따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달의 민낯은 상상 이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유산 답사, 체험 등의 프로그램과 연결하면 참신한 테마로 각광 받을 듯 하며, 또한 천편일률적인  답사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나이에는 마주 앉은 여인네 눈동자에 비친 달이 가장 아름다운데...

 

솟을 삼문

 

독락당()

회재() 이언적(, 1491~1553)이 벼슬길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은 주택의 당호이며, 좌향은 자계천이 동쪽에 흐르는 서남향으로,솟을삼문, 행랑채, 안채, 사랑채, 계정(), 어서각(),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높은 담으로 쌓인 공간구조, 양동 마을과의 관계, 풍요의 은거, 사상, 이전인 등의 이바구를 일천한 지식으로 피력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논조로 판단하고 독락당만 돌아보고저 합니다.

 

별채(?)

 

 

행랑채

낮은 기단 위에 전면 일곱 칸 규모이며, 우측으로 사랑채로 가는 중문과 두 칸의 온돌방, 부엌, 좌측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청재

행랑채에 걸린 당호

 

 

 

안채

행랑채 좌측 끝의 안채로 들어가는판문과 내외담

출입 금지구역이어서 안채, 안마당을 살필 수 없었습니다.

 

 

중문

옥산정사, 자계천으로 통합니다.

안채 진입공간이 아닌데도 자계천으로 나가는 좁은 길, 한번 더 꺽여 협문을 통하여 사랑채로 들어가는 구조 등은 독락당 당호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중문으로 들어서 우측 자계천으로 향하는 골목

 

 

협문

옥산정사로 들어가는 문

 

 

사랑채

독락당과 옥산정사玉山精舍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대청과, 전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안채로 연결되는 뒤쪽에 반 칸짜리 서고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안채와 연결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연유로  대청에는 팔작지붕 형식이고 안채 방향으로는 우진각 지붕입니다.

 

 

옥산정사 玉山精舍

퇴계 이황의 글씨

 

독락당

아계 이산해 작품

 

 

대청

마루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깔려 있습니다.

본래 우측에는 별도 방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문을 열면 자계천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낙성송洛城送

 

 

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

이경산환향래방차오봉운 李慶山還鄕來訪次五峰韻

서애의 생몰년대를 감안하면 을해乙亥는 1575년이며 음력 팔월 추석 직전에 쓴 글씨 같습니다.

 

 

독락당 십사영

독락당 주변의 14곳을 노래한 글 입니다.

 

 

독락당십사영 獨樂堂十四詠

아쉽게도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글씨의 내용보다 수기가 눈에 들어왔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이 영 아닙니다.

 

 

옥산정사 측면

문을 개방하면 담장에 설치된 간살을 통해 자계천이 눈에 들어 옵니다.

 

 

자연과 합일

비록 몸은 혼자이지만 자연과 교류하려는 회재의 심성을 나타내는 문으로 이릅니다.

담장을 철거하면 어떠했을지...

 

 

옥산정사 후원

약쑥밭이 있습니다.

 

 

 

협문

계정.사당으로 통하는 문

 

 

어서각

인종이 회재에게 보낸 수필답서를 보관하기 위하여 1835년에 세워진 건물

 

또한 이 곳에는 해동명적이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해동명적海東名蹟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사당

이중담이 쌓여 있으며, 까치발로 바라본 문의 卍자 문양.

정확히는 卍자가 아니며 길상,벽사를 상징합니다.

 

 

계정

"계정은 마당에서는 거의 수평으로, 외벌대의 기단 위에 놓여 있다. ‘ㄱ’자로 된 평면에 계정이라는 두 칸 규모의 대청마루, 한 칸 온돌방 인지헌, 서고인 양진각, 창고가 이어져 있다. 이 건물에 맞댄 담장 뒤편에도 담장을 두어 사당을 모셨습니다.자계천쪽 기둥은 천연 암반 위에 세웠다.


계정의 첫째 아름다움은 마당에서 계정을 거쳐 자계천과 산이 담장이나 다른 건물에 막힘없이 하나의 공간처럼 연결도록 만든 처리 기법이다. 둘째는 계자난간과 청판에 조각된 박쥐모양의 투창 사이로 집 안과 집 밖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면서 정자의 격을 갖추고 있다. 또 하나는 계정의 대청마루로, 산과 계곡의 시원한 공기 흐름이 어서각의 나무 살창 사이를 거쳐 이곳에 있는 이언적 선생의 중요한 수묵들을 보존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해인사의 장판각과 비교될 수 있는, 자연 환경을 이용하여 문화재를 보존하는 방법이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출처/한옥의 미, 2010. 7. 15., 서정호) 

 

 

양진암養眞菴

이퇴계 작품

회재와 교류가 있었던 정혜사 스님을 위한 공간 으로 전합니다.

 

 

정혜사지 13층석탑

 

 

계정

한석봉 글씨

 

 

인지헌 앞 난간

 

 

인지헌仁智軒

한석봉 글씨

인자요산 仁者樂山,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대응을 통해 양진암 계정마루와 화개산과 자계를 종합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이안눌李安訥(1571~1637)

만력갑인萬曆甲寅(1614년)

이안눌이 경주 부윤 재임시에 쓴 글 같습니다

 

 

회재의 글씨도 있고...

 

 

자계천

 

 

차경 借景(1)

 

 

차경 借景(2)

 

 

차경 借景(3)

 

 

차경 借景(4)

 

 

회재는 도덕산(道德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무학산(舞鶴山)을 사산으로 불렀으며, 이중 자옥산은 옛부터의 이름이며 나머지는 회재가 명명하였습니다

 

 

계정

회재선생이 관어대로 명한 바위위에 걸쳐있습니다.

 

 

溪亭계정...회재 이언적

喜聞幽鳥傍林啼 희문유조방림제. 숲속에 우는 새는 듣기에도 즐겁구나

新構茅簷壓小溪 신구모첨압소계. 시냇가 경치따라 집한채 이룩했네

獨酌只邀明月伴 독작지요명월반. 밝은 달 벗삼아 술잔을 기우리고

一間聊共白雲棲 일간료공백운서. 한간의 흰구름과 함께 살아보리라

 

 

오대五臺.

계정에서 볼 수 있는 계곡의 바위이며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를 이릅니다.

 

 

누하주.계자난간

 

 

아궁이

 

 

독락당 獨樂堂

조선 중기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노계집(蘆溪集)』권3에 실려 있다. 3음보 혹은 4음보를 1행으로 헤아려 총 123행으로, 박인로가 지은 가사 가운데 최장편이다. 주제는 작자가 이언적(李彦迪)의 유적인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을 찾아가 그를 사모하는 심회와 주변 경치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10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단락에서는 임진왜란을 당해 무부(武夫)로서 여가 없이 분주하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오랜만에 독락당을 찾으니 산봉우리는 빼어나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武夷山)과 같고, 흐르는 물은 감돌아 정이(程頤)가 살던 이천(伊川)과 같다고 하였다.

 

둘째 단락에서는 신라 천년 고려 오백 년 사이에도 성현군자는 많았는데, 이러한 명승지를 하늘이 감추어서 이언적에게 준 것은 물각유주(物各有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의 유한한 경치와,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잠겨 생각하고 깨닫던 이언적의 모습을 안증(顔曾)과 유하(游夏)를 좌우에 거느린 공자에 비유하였다.

 

넷째 단락에서는 이황(李滉)의 친필이 담긴 양진암(養眞庵)과 관어대(觀魚臺) 반석(盤石) 위에 남은 이언적의 지팡이와 신발 자국, 손수 심은 큰 소나무를 대하니 마치 지란실(芝蘭室)에 들어간 듯하다고 읊었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병풍 같은 층암절벽, 하늘과 구름이 비친 백척징담(百尺澄潭), 저녁 안개에 잠긴 청계조기(淸溪釣磯)의 묘사를 통해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던 이언적의 자취를 더듬었다.

 

여섯째 단락에서는 영귀대(詠歸臺)의 아름다운 경치에 풍영이귀(風詠而歸)한 증석(曾晳)의 옛일을 생각하고, 자연(紫烟) 비낀 폭포를 보며 여산(廬山)에 비기고, 징심대(澄心臺) 맑은 물에 가슴속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탁영대(濯纓臺)를 보고는 속세에서 부귀공명을 어지럽게 다투는 속인들을 생각하고 개탄하고 있다.

 

일곱째 단락에서는 사자암(獅子巖)에 올라 도덕산(道德山)을 바라보며, 이언적의 덕망이 구슬이 쌓여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고 추앙하고, 이백(李白)의 시를 빌려 이언적을 봉(鳳)에 비겨 봉새 날아간 빈 산에 두견새만 저녁에 운다고 하여, 그가 가고 없는 쓸쓸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선생의 자취를 천태산(天台山)과 무릉도원에 비겨 신선으로 받들면서 해질 무렵까지 돌아갈 줄 모르는 간절한 사모의 정을 그렸다.

 

여덟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에 다시 올라 이언적의 풍채와 덕행을 다시금 추앙하고 독서 소리가 이어졌던 서원의 번성함을 읊었다. 동방의 군자인 그가 직설(稷契)과 같은 충성으로 당우(요순시대)의 성시를 이루려 했는데 불행히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가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적소에서도 끼친 감화가 깊어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 사당까지 세우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아홉째 단락에서는 구인당(求仁堂)에 올라가 체인묘(軆仁廟)의 엄숙함을 보고 동방의 문물을 한(漢)·당(唐)·송(宋)에 비유, 주자가 살던 자양운곡(紫陽雲谷)이 바로 여기라고 감탄하였다. 세심대(洗心臺) 물에는 덕택(德澤)이 지금도 이어 흐르는 듯하고, 용추(龍湫) 깊은 곳에는 신물(神物)조차 잠겨 있는 듯, 그의 무궁한 덕화력(德化力)은 기이한 하늘의 조화와 함께 어울린 듯하다는 느낌을 말하였다.

 

달포를 머물면서 그의 문집을 살펴보고, 그것이 모두 성현의 말이어서 일월같이 밝으므로 밤길에 촛불 잡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끝으로 열 번째 단락에서는 이언적의 유훈(遺訓)을 가슴깊이 새겨 그를 오래도록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추앙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박인로의 가사에는 성현의 치세에 대한 동경이 나타난 것과, 현실과 이상이 합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작자의 고민이 함께 표출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선현을 사모하고 추앙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랫만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정 누마루에 앉아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주제를 주고받은 대화도 즐거웠지만, 돌아서는 내내 이전인선생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을인가요?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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