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덕군

영덕...유금사 영운당 부도

임병기(선과) 2019. 10. 24.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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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

예전 답사에서 놓쳤습니다.

 

마을을 지나 절 입구 우측 다리 건너 감나무 과수원에 자리합니다.

 

 

 

영운대선사탑 影雲大禪師塔

1806년

 

 

종형 부도

특멸한 문양이 없고, 탑신과 연화보주가 일석이며 4면을 얕게 깍아 장방형 느낌 입니다.

 

 

영운당대선사탑비 影雲堂大禪師塔碑

 

 

영운당대선사탑비 影雲堂大禪師塔碑
銘文

<正面> 影雲堂大禪師之碑」

<背面> 師諱□應師之恩師○雲堂大禪師年邁二…」丁卯九月二十二日天命有恨遷化敀真三日間…」償其燃炎則 二介灵珠完在其中如此稀貴…」立衰于洞門巳向之原永世不忘爲 僧…」師兄泰性侄戒弘道宇道善 義黙海朋 俗…」之金大○本金海母逹城徐氏三寸
首座性黙…」

 

<右面> 嘉慶十一年七月二十四日立
石 三綱」和尙大心」書記有覌」三補○仁」

<左面> ○生鳳連次律○次完碑」

(출처:한국의 사찰문화재)

 

한문이 짧아 정확히는 해석 못 하지만 김해김씨이며,어머니는 달성 서씨 입니다.

은사,  사형 등 주변 스님들을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며. 이력에 관한 행장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를 세운 가경11년은 1806년 입니다.

비문의 내용중 열반은 정묘년이며 사리 3과가 수습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부도비는 1806년, 부도는 1807년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니면 부도는 부도비 조성 이전의 정묘년인 1697 입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사찰문화재의 가경 11년(嘉慶十一年七月二十四日立)은 정묘년(丁卯年)인 가경 12년의 오타로 생각됩니다

 

 

 

 

 

 

비구니 정음당 상덕 스님

근자에 조성한 듯 보입니다.

 

 

어둠이 내리고

사찰순례단이 막 도착하여 유금사 참배는 건너 뛰었습니다.

 

2019.10.06 

아래는

2010년 글

 

보제루

 

해안도로를 벗어나서도 구비구비 구절양장의 산속으로 길은 이어진다. 이 깊은 자리에 절터를 잡은 선인의 안목을 오늘의 시점에서 이해할 수 없지만 마치 풍수에서 회자되는 십승지지 처럼 느껴진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지금은 접근이 용이하지만 예전에는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절집이 아니었을 것이다. 

 

칠보산 . 일곱가지 보물을 감추고 있어 칠보산이라 불렀다고 했다. 그 보물은 무엇일가? 금이 많이 매장되어 유금사로 불리었다면 칠보는 장인이 지극정성으로 조성한 금불상은 아니었을가?

 

 

유금사는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칠보산에 위치한다.  신라 선덕여왕 6년(637) 자장율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고 다만 조선 중기까지는 절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중건되었으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고, 현 건물은 중수시 천장에서 나온 보자기 내용에 의해 조선 인조 5년(1627)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중수기에 금으로 쓴 ""초창건질천계칠년오월 건륭삽십팔년계사 사월십일일 파좌상견우인공찰창 녹화 녹즉추서(初創建秩天啓七年五月 乾隆參拾八年癸巳 四月十一日 破座詳見右人公刹創 綠化 錄則追書)""라고 쓴 글씨가 발견되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장.관음 아미타불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이다. 작은 절집 대웅전에 새롭게 유행하는 삼존불로 어느 스님은 "이시대에 효자.효부가 많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씀하시었지만 유쾌하지만은 않다. 훗날 사가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불상조성의 트랜드로 표현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대웅전 후원에 자리한 삼층탑. 의문이 들었지만 본래의 자리는 현재 대웅전 앞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환경에 적응 하듯이, 작은 절집 뒤뜰에 다소곳이 있는듯 없는 듯 산새소리 벗삼아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탑 앞 피리부는 동자상은 탑속에서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불상을 모델로 봉안하였다.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피리부는 동자 악천상...우리카페 빨간약님 사진

 

상.하기단에는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안정감 있는 기단부와 비례감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삼층탑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 받침은 2단이며, 옥개석과 각각의 부재로 조성한 탑신에도 양우주가 보인다.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고 옥개받침은 4단이며 전각의 반전은 심하지 않다. 수더분하지만 단정하며 엄정한 자태의 석탑은  보물 제 674호이다. 
 

 

삼층석탑 앞 배례석. 장방형 석재 전후면에 2개 안상, 양 측면에는 1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왠지 낯선 불상. 가분수로 복원한 불두 때문인가? 약병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형의 약합을 든 약사여래불. 기단과 좌대, 불두는 근자에 복원한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습의가 발목까지 드리워져 있다.탑과 함께 조성하였다면 신라후기 불상이겠지만 오히려 대웅전을 중창한 조선 인조재위시에 조성한 불상이 아닐까? 

 

유금사에 전해오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를 풍경속에서 그려 본다.

신라말엽에 장화부인이 마의태자에게 연정을 품었으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체 정처없이 떠나 헤매다가 찾아온 곳이 유금사 금선암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쳐 입산한 장화부인은 항상 마의태자가 왕위에 오르기를 축원하기 위하여 축단을 설치하여 주야로 불공을 올리던 어느날 경주에서 전갈이 오기를 "마의태자가 금강산 방면으로 삼베옷을 걸치고 종적을 감추었으니 아마 죽은 것이 틀림없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이 전갈을 들은 장화부인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 앞이 보이지 않아 허둥지둥 축단을 찾아 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의태자가 극락가기를 십여일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주야로 기도하다가 그만 그 축단 앞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애통하고 애절한 일이라 이곳에 같이 살던 보살들이 힘을 모아 정성껏 장사지내고 큰 묘폐를 형성하여 놓았습니다. 묘 봉수에 돌아가며 석축을 박은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하늘에 기도하던 축단도 보존되어 왔고, 그 후 장화부인의 신영각을 지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유금사 동남쪽 약 500m 지점에 석축으로 조성된 거대한 고분이 신라 경순왕의 후비 장화부인능이라고 전해진다.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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