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군산시

군산...신영균 철비

임병기(선과) 2019. 9. 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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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면 학당리869

마을 재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신영균 형제 기적비과 함께 있습니다.

 

 

현감 신 후 영균 애민선정비

縣監 申 侯 永均 愛民善政碑

 

애민,선정의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백21년전, 진안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가 전시중이어서 흥미를 끈다. 유생 이택열 등 1백24명이 진안현감(1885.5-1888.3) 신영균(申永均, 1833-1922)의 선정을 기리는 ‘천인산(일산(日傘)으로, 감사, 유수, 수령 들이 부임할 때 받치던 양산)’을 정성스럽게 손수 만들어 바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7월 출범, 민선4기를 맞이한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위민(爲民)의식과 투명한 행정의 실현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하나의 본보기로 비춰지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제3전시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지난 6월 14일부터 새롭게 변한  ‘한국인의 일생관’을 개관, 양반 사대부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인생 여정을 중심으로 전시 주제를 세분, 모두 1천4백 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 전시는 각 유물을 하나의 오브제화 하거나, 모형 중심 연출에서 벗어나, 주제별 유물을 중심으로 맥락 전시, 조선시대 한국인의 일생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게 끔 했다. 대표적인 전시 유물 상여(중요민속자료 제230호)를 필두로, 초헌, 영정, 천인산 등이 주제에 맞추어 선보이고 있다.


 3층 누각 형식의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앞에는 상여 행렬을 연출하여 명정과 만장이 날리는 가운데 문인석이 서 있는 무덤으로 향하게 했다. ‘출세’ 주제에는 민광승, 권협 등 문무관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2품 이상의 정승들만 타고 다녔던 외바퀴의 초헌이나, 지방관의 선정을 기원하며 전 지역민의 이름을 수놓아 바친 ‘천인산’ 등 일생의 하이라이트라 할 부분에 대한 연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통 ‘천인산’ 등 일산은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세우는 큰 양산으로, 우산보다 크며 놀이를 할 때에 한곳에 세운기도 하는 한편 감사, 유수, 수령들이 부임할 때 받치는 자루가 길고 흰 바탕에 푸른 선을 두른 물건.

 진안현감 신영균의 선정을 기리며 만든 ‘천인산(千人傘, 지름 1백40cm, 길이 2백30cm)’은 고종 22년(1885년) 11월에 유생 이덕연 등 1백24명의 사람들이 참여 그 공덕을 흥모하면서 만든 소중한 유물이다.


 그 내용은 ‘천인산(千人傘)’이란 타이틀과 함께 ‘수복강령(壽福康寧)’이란 글로 시작, 이어 주민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귀감이 되는 정치를 생활화, 그 감화를 잊지 못한다는 내용이 수(繡)놓아 쓰여져 있으며, 바로 그 뒤에 1백24명의 명단이 모두 나열됐다.


 1885년 5월부터 1888년 3월까지 진안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선정을 베푼 까닭에 지역민들이 그를 ‘신보(神父)’라 부르고, 생사당(生祠堂,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하기도 했다는 기록이다. 후에 진안구 상전면 갈현마을에 살았다는 일부의 기록도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최순권연구사는 “‘한국인의 일생관’은 주제 중심으로 유물들을 맥락화하면서 체험 및 휴게 공간을 마련, 관람객들이 쾌적하게 전시를 관람하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생과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며 “특히 지방관의 선정을 기원하며 전 지역민의 이름을 수놓아 바친 천인산은 전시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출처...이종근의 한국문화스토리)

 


신영균(申永均. 1833년(순조 33)∼1922년)

"조선 말기의 문관.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형(順亨), 호는 인당(忍堂) 또는 초성(蕉醒).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 종태(鍾泰)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진사 광복(光福)의 딸이다. 1876년(고종 13) 장사랑에 제수되어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을 지냈으며, 1880년 의금부도사, 1885년 공릉령(恭陵令), 1888년 진안현감, 1902년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진되었다. 그는 조선 말기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진보적인 시각에서 민족적인 자부심의 회복과 국력의 신장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 때 동지 100여인을 규합하여 세자와 신정왕후(神貞王后)·명성황후(明成皇后)를 호위한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내탕금(內帑金) 5,000냥을 하사받았는데, 그는 이 자금으로 갑신정변에 반대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창의계(倡義契)를 조직하여 왕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주민들이 그를 신부(神父)라 부르고 생사(生祠)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인당집》 2권이 있다."(출처/다음)

 

(1888년은 1885년의 오기로 보이지만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왜 현감 이력은 전북 진안인데 철비는 군산에 있을까요?

 

고인이 된 닭밭골 심충성님이 그 까닭을 소상하게 파악한 내용을 그의 블로그에서 옮겨 왔습니다.

 

"이 비는 진안 군청사 앞에 있었는데 1978년 군청에서 진안읍 군상리 우화정 부근 오솔길로 옮겼으나 망가지자 같은 동네에 살던 신영균의 막내딸 신기춘 할머니가 집창고에 보관하던 것이 중앙일보 1983년 4월4일자에 나와있네요. 그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곳에서 관리할 사람이 없어 신영균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 내기마을 뒤편 계령산 동남쪽 정상 묘앞에 세워놓았다가 그후 2000년 12월 묘의 상석과 봉분 테두리석을 새로 하면서 평산 신씨 문중에서 깨진 밑부분을 용접을 해서 재실옆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                         


                           

 

 

광서 십이년 십일월 일 립. 1886년 11월

光緖 十二年 十一月 日 立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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