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군산시

군산...동국사

임병기(선과) 2016. 11. 1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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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아래 글은 동국사 홈페이지에서 옮겨 왔다.

 

"동국사의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이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曹洞宗) 사찰이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大谷派)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一蓮宗)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同化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본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內田佛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지역을 순석(巡錫)하다가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단기간에 본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檀家)에서많은 시주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사에 등록된 단도(檀徒)로는 대지주였던 궁기가태랑(宮崎佳太郞)과 웅본이평(熊本梨平)을 비롯하여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하전길태랑(下田吉太郞) 등이 있었다.

 

동국사 창건의 역사적 배경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韓日合邦) 1년 전인 1909년 일본 승려(僧侶) 선응불관(善應佛觀)스님에 의해 창건(創建)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그리하여 대한제국(1897-1910순종,隆熙.3)과 일제 식민지시대(日帝時代,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9년(己酉, 불기2453년, 단기4242년, 대한제국 순종隆熙.3년)은 일본 년 호로 명치(明治)42년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勝利)하였고, 1909년 7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해이며,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를 암살(暗殺)한 해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병합(倂合)의 추진이 가속화되던 때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庚戌國恥)이 맺어지면서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45년까지 36년간의 고통어린 식민지배(植民支配)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爭奪戰)의 일환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삼아 공식적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덴노(명치천황.明治天皇) 시대의 과두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조선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 하던 시기다.

이렇게 볼 때 동국사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합방에 앞서 그들의 국교이다시피 숭상되고 있는 불교를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왜색불교를 전파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간 불교가 식민통치 수단으로 역수입 된 것이므로 종교도 국력 앞에서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동국사명은 1955년 '불교 전북 종무원'에서 인수하여, 김남곡(1913~1983)스님이 이제부터는 ‘우리나라[海東國] 절이다’는 뜻으로 동국사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정문의 2기둥은 1921년에 세웠다고 한다.


차문불문此門不門

이 문은 문이 아니다.

즉,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는 의미다.

군산출신 고은 시인이 이글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에 실려있다.

실제로 고은 시인은 1951년 당시 동국사 주지인 혜초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000금강사錦江寺

훼손된 명문은 조동종曹洞宗 아닐까?

 

 

소화9년6월 길상일 昭和 九年 六月 吉祥日

훼손된 명문은 소화昭和이며, 기둥을 세운(1921년) 후 소화9년(1934년) 명문을 새겼다.

 

 

노희윤?

시주사이거나 명문을 새긴 사람?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장대석 기단에 놓인 방형 초석 위에 방주를 세우고, 중방과 상인방 등을 기둥과 직교시켜 벽면을 구성하였다. 기둥 위에 공포가 배열되어 지붕 가구를 지지하고 있다. 공포와 급경사의 지붕형식에서 일본 건축 형식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정면에는 정(井)자살 4짝 미서기 문을 설치하였고 좌우 협칸과 퇴칸, 측면에도 미서기 창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전면 쪽에 2개의 원주가 있는데, 기둥 사이에 걸쳐진 보 위에는 소나무나 화초 등을 투각한 난간이 장식되어 있다. 후면 쪽에는 4개의 원주가 있는데, 그 중앙의 후벽쪽에 불단이 설치되어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 가람배치와 다르게 대웅전과 요사가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전면과 측면에 창호가 설치된 점도 우리의 사찰전각에는 볼 수 없으며, 습기를 고려한 듯 하다.

대웅전 기둥, 불단 등의 재료도 일본에서 공수한 일본 향나무라고 한다.

 

 

소조석가여래삼존불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각 좌, 우측에 가섭존자, 아난존자가 위치하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자세와 생동감 있는 표정이 특징적이다. 복장 유물로는 경전류, 후령통[복장에 넣는 통] 등 373점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의 조성 시기, 조성 주체 등을 알 수 있다. 불상 조성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인 호연 태호(浩然 太湖)와 벽암 각성이 불사를 이끌고, 부드럽고 온화한 조각을 구사한 승려인 응매(應梅)가 조각을 주도하였다. 1650년에 제작되어 금산사 대장전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금산사에서 동국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기둥이 높은 팔작지붕의 범종각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유형의 전각이다.

범종각에 걸린 범종도 지면과 거의 맞닿은 우리 사찰 범종과 달리 종각 지붕에 높게 걸려 있다.

 

 

범종

1919년 일본 경도에서 다카하시 장인에 의해 주조되었다고 전한다.

용뉴에는 일체쌍두형의 용을 배치하고, 유곽없이 108개 유두를 조성하였다.

종신에는 시주자, 금강사 창건 내력, 천황 찬가를 새겼으며, 하부에 2개 당좌를 마련하였다.

 

 

 

1919년 조성된 불상

본존불 8분, 33분 관음보살,12지상을 모셨다.

보살상 대좌에는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목포 유달산에 조성되었던 88야불에는 시주자와 번호가 새겨져 있다.


 

 

일본식 전각, 문화재. 일제강점기의 흔적


무작정 배척해서는 절대 안된다.

눈으로 보고, 현장을 확인하고 간직해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201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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