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천서원(稷川書院)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운 정사진(鄭四震)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702년(숙종 28)에 영천 우항(愚港)에 입암서원(立巖書院)으로 세웠다가, 1711년(숙종 37) 직천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헐린 것을, 경주에 사는 후손들이 1979년 대동에 다시 세웠다. 매년 3월 하정(下丁)에 향사지내고 있다."(장달수의 한국학카페)
솓을 문 밖에는 묘정비가 있으며 사당과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 입니다. 강당인 양정당(養正堂)에는 동재만 있고 서재는 없으며, 서편에는 담장 너머에 포사가 자리합니다. 사당인 숭학사(崇學祠) 좌우에는 동,서무가 없습니다..
직천稷川 의미와 유래가 궁금 한데, 최초에 정사진을 배향하는 서원이 영천 직천稷川에 있었다는 자료 외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의병장과 관련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인 격전지에서 흘러내린 핏내에서 유래하지 않았나?라고 추정도 해보았습니다.
수재문(修齎門) 외삼문 입니다.
양정당(養正堂)
동재(東齋)
포사(胞舍)
정사진(鄭四震, 1567~161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군섭(君燮), 호는 수암(守菴). 영천 출신. 일찍이 여러 동지들과 자양동에 들어가 과거공부를 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아버지는 문과 삼변(三変)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여 그의 학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606년(선조 39) 왕자의 사부(師傅)를 제수받았고, 1611년(광해군 3) 세마(洗馬)·시직(侍直)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인의왕후(仁懿王后)와 선조의 상 때에는 모두 기제(朞制)를 입었으며, 친부모상을 당한 것과 다름이 없이 행하였다. 나라에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채식을 하였다. 몸가짐이 독실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하였다.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2권이 전한다."(장달수의 한국학카페)
숭학사로 통하는 중문
숭학사(崇學祠)
양정당 측면 기단 눈에 들어 온 탑신부재는 기단 중석 2매 입니다.
우주 1주, 탱주 1주로 미루어 엇물림으로 결구된 상층기단 중석으로 추정 됩니다. 어디서 옮겨 온 부재인지...
우주1.탱주 1
주초를 비롯 치석된 석재들이 있었으나 까치발로는... 그렇다고 월담할 수도 없고.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상시개방은 등재된 서원만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늘 닫힌 문, 도둑처럼 까치발로 기웃기웃...
2019.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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