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옥련서당. 석탑재

임병기(선과) 2019. 7. 20. 08:31
300x250
300x250

 

 

 

옥련서당玉淵書堂

내남면 망성리 탑골에 위치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1849년 옥연사玉淵祠로 창건,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60년 중건 옥련서당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모암.옥련서당

 

 

매헌 권사민(1557년 ~ 1634)

 

매헌공(梅軒公)은 5대조가 사정공(司正公)이며 선친이 귀봉공(龜峰公)이다.

명종 12년 출생하여 천자(天資)가 총명하여 6,7세에 운율(韻律)의 고저를 깨닫자 귀봉공이 ‘이런 인재가 늦게 태어나니 나의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구나!’하였다. 16,7세에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익히고 주역과 논어 등 책을 놓지 않했으며 자리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써놓고 ‘주역의 회린(悔吝)과 논어의 근본과 중용, 대학의 미묘함을 알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것 없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사람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호를 매헌(梅軒)이라 하고 여묘(廬墓)할 때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자 ‘너는 영물(靈物)인데 어찌 남의 어버이를 놀라게 하느냐?’ 울면서 바라보니 호랑이가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다. 고로(故老)들이 이르기를 ‘공의 정성과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고 하였다. 육징불부(六徵不赴)로 이름난 이승증(李承曾)이 선생의 효성과 공경함과 문학의 뛰어남을 감탄하여 ‘권모의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은 실로 우리의 사표(師表)이며 영남 후학들이 자랑으로 여기어 본받을 만하다’고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며 ‘권모의 배운바는 스스로 연원(淵源)이 있다.’고 하였다. 20세 이후 향시(鄕試)에 10여회, 회시(會試)에 4회 합격하였다. 글을 배우려는 자가 수천명에 이르니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7개 고을의 훈도(訓導)를 지내고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와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경인년 밤에 천상(天上)을 보니 요성(妖星)의 빛이 청구성을 쏘니 왜구가 침범할 형상이다. 사람들에게 빨리 결혼하기를 재촉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자옥산 중봉에 이르러 참봉 김예심을 만났다. 의병을 모을 계책을 물으니 김공이 이르기를 ‘무엇이 어렵겠소? 공의 두터운 명망은 선비의 마음을 추복(趨服)하게 한지 오래라 창의(倡義)한다면 누가 듣고 이르지 않겠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팔공산은 영남의 중심이고 약암은 천해의 요새(要塞)이니 그곳이 좋겠구려’ 하였다. 약암에서 일곱 고을의 의사를 모았다.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자 김공에게 이르기를 ‘공은 집안이 넉넉하니 비축해 둔 곡식이 있습니까?’ 하니 ‘백여섬 자옥산 아래 갈무리되어 있소’ 하였고 공은 ‘나도 서재를 위한 곡식 백여섬이 두류동에 갈무리 되어있소’ 하고 차례로 운반해 먹였다.

 

왜적이 조령을 넘은 뒤에 작은 적을 만나면 활을 쏘고 돌을 굴려 죽인 적이 무수히 많았다. 하루는 의병 100여명을 계곡에 숨겨두고 몸소 적진과 충돌하였는데 적이 추격하다가 의병들이 돌을 굴려 모두 죽였다. 또 소공암에 술을 놓고 의병들로 왜적을 유인해 왜적이 술에 취할 때 진격하니 수백명 적의 목을 베었다. 갑오년(1594년) 만우당이 의병을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만우당 곽재우(郭再祐)휘하에 들어갔다. 곽공이 칭찬하여 ‘적이 밀어 닥칠 때 누가 피하지 않으리오만은 그대는 의분을 떨치고 일어나 응모하였으니 참으로 의병(義兵)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삼가의 권양과 의령의 심대성이 힘을 합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다.

 

공이 곽선생에게 ‘창영에 화왕산성이 있으니 나라의 남문입니다. 이 성을 지킨다면 오적이 창궐하는 것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니 곽공이 ‘공의 충의를 듣고서 훌륭하게 여겼더니 이제 계책을 듣고 보니 시원스러음을 깨닫겠구료’ 하고 화왕산성에 들어갔다. 화왕산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훈상으로 언양현감을 제수하였으나 양친을 위해 경주 내남면 명예동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유년 공은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에서 시묘하였다. 만년에 두릉에 서실을 지어놓고 난리에 책이 불타버려 공은 손수 베껴 후학들에게 읽게 하니 문하에 선비들이 대과(大科), 소과에 오른 사람이 10여인이었다. 공은 근사록과 자경편을 좋아하였고 천한 종이라도 대접하므로 공의 성냄을 볼 수 없었다. 도망간 노비의 자손이 부자가 되었거나 무과에 급제한 자 수백에 이르렀으나 자식들에게 들추어 내지 말라고 하였다. 노비 중 양인(良人) 소생은 속량금(贖良金)을 주어 양인이 되도록 하였다. 인조 12년(1634년) 고종하니 향년 78세였다. 정조 6년 좌승지(左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추증되었다. 문중에서 교지(敎旨)를 보관하고 있다.

 

정조 8년 효충(孝忠)의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정조 12년 후학을 가르친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712번지에 옥연서당(玉淵書堂)을 창건하여 제향(祭享)하였다. 내남면 망성리 808번지에 충효정려각(忠孝旌閭閣)과 공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이 있다. 매헌실기 4권이 있고 묘소는 경주시 내남면 노곡에 있다. 행장은 양관(兩館)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이 짓고 묘지는 좌랑 남경의(南景義)가 지었으며 비문은 판돈령 이민보(李敏輔)가 지었다. 정려(旌閭)의 기문(記文)은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浩)가 짓고 우의정 이휘지(李徽之)가 썼다. 또 좌승지 심기태, 이조참의 조정진, 우의정 이휘지, 규장각 제학 오재순, 예조참판 남현로,우 참찬 홍문관제학 수상, 풍성 조정화, 한성서윤 정지덕이 정려기를 쓰고 옥연서당 상량문은 여강 이해상이 쓰고 강당기는 부윤 이원조가 썼다. 묘표는 오위도총부 부총관 조정윤이 쓰고 묘지명은 남경의가 쓰고 묘갈명은 여강 이재희(李在喜)가 썼다.

 

행장(行狀)은 규장각 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쓰고 또 형조참판 김이성이 썼다. 홍양호가 쓴 정려기의 요지는 ‘공은 팔공산에 웅거하며 곽재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화왕산성에서 적을 크게 깨뜨려 영남의 좌도 10여 고을이 온전하였다. 의병을 일으킴에 증직되었으나 효행이 우뚝한 것을 보니 마땅히 표창하여야겠고 임금이 특별히 旌閭를 명하였다. 대저 사람의 큰 절의(節義)는 충효(忠孝)보다 더 숭상(崇尙)할 것이 없는데 공은 오직 충성으로 그 벼슬을 증직받았고 효성(孝誠)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니 아! 성대하구나’ 하였다. 또 읍지(邑誌)에 ‘임진왜란 때 의병 100여명을 모아 팔공산에 진을 치고 적을 죽였으며 가산을 기울여 군량에 충당하였다. 그러다 곽재우의 군과 합쳐 화왕산성을 지켰으며 수차 공을 세웠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의 사적기는 지중추부사 권상일(權相一), 유의견, 이급, 김양근, 권보, 이겸환 등 많은 분들이 썼으니 공에 대하여 다투어 글을 남김을 자랑으로 여긴 듯하다. 아들은 하양 훈도(訓導)를 한 응립(應立)이고 손(孫)은 3형제를 두고 고손 죽헌공(竹軒公) 칭형(稱衡)을 위한 숭모재가 내남면 망성리에 있다(자료제공 : 후손 권창괴 편술 현봉 권경석)

(출처/근암서원.금천강님 글)

 

 

 

 

 

모암慕菴

위 근암서원 자료에 첨부된 사진에는 31세손 모암공 학인의 재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옥련서당 석탑재

상시 개방이 되지 않아 뒷담에서 까치발로 보았습니다.

 

서당 잎쪽 경작지는 사찰명이 전하지 않은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사지총람에는 희강왕릉,민애왕릉과 관련된 원찰로 추정하며, 통일신라~조선시대까지 기와조각이 발굴,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석탑 옥개석 편

서당 건물 후면 잘려진 석탑 옥개석 2개가 주초로 사용되었습니다.

 

 

옥개석

뒤집힌 상태이며, 3단 층급이 굷게 치석되었습니다.

 

 

기단석

주차장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층기단 저석과 중석이 일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중석에는 탱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저석은 지표에 드러난 표면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깊게 매몰된 부분은 치석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방문.

오늘은 확실히 옥개석의 위치를 알고 왔으며, 기단석은 지난 방문 때도 보았으나 알지 못했으니.

경주 김환대님의 정보 공유에 감사드립니다.

 

2019.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