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문경...근암서원. 석탑 부재

임병기(선과) 2019. 6. 1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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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近嵒書院

 

"1551년(명종明宗6)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선생이 세운 18서당의 하나인 영빈서당이 그 모태로 고노古老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현촌縣村 천변창사남川邊倉舍南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산양창의 남쪽 10리 지점에 해당되는 지점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 고장 출신으로 갑사사화甲子士禍에 피화되어 해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활재活齋 이구李榘가 계사癸巳년 4월에 상주목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리고 이어 갑진甲辰년 7월에 부사를 역임한 전명룡全命龍이 다시 정문呈文을 올려 관의 승인을 받아 1665년(현종6)을사乙巳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여 향현사鄕賢祠가 되었으며 그 후 4년 뒤인 1669년(현종顯宗10) 을유己酉에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을 추배하고 예조의 허가를 받아 서원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1702년(숙종28)에는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두 선생을 추배하고 1786(정조10) 병오丙午에 활재 이구活齋 李榘,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세 분 선생을 배향하여 7현사가 되었으며 묘호는 경모사景慕祠, 원호院號는 근암近嵒이다. 근암서당近嵒書堂의 현액懸額 글씨는 장문당藏文堂 원진해元震海(1594-1651)의 글씨인데 서원으로 승원陞院 하면서 “원院”자를 조시호曺時虎가 고쳤다고 한다.

 

흥교당興敎堂과 주일재主一齋의 글씨는 상주목사를 역임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龍의 글씨이고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岺이 지나다 이곳에 들러 지은 시판의 글씨는 교관 신명전敎官 申命傳의 글씨이며 지원루知遠樓 욕인재欲仁齋 유의재喩義齋의 현액懸額은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와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는 처사 오상원處士 吳尙遠의 글씨이다. 1870년(고종高宗7)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고 다시 복원하였다.
 
(현現 근암서원近嵒書院 현액懸額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14대손인 처사 성암 이원기處士 星庵 李源箕선생이 썼고 2011년 중건 때 탁본하여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암 이원기 처사의 14세 때 쓴 글씨라고도 전한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에서 발췌) 

 

 

지원루知遠樓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작품

 

 

근암서원은

전형적인 서원배치인 전학후묘입니다.

 

외삼문. 지족루

강당.흥교당

동서재.욕인재와 유의재

내삼문

묘우.경모사

전사청

 

 

흥교당興敎堂

내부에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바깥에는 강학공간근암서원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진성 이원기 서

1982년 중건 때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14대손인 처사 성암 이원기處士 星庵 李源箕선생이 썼고 2011년 중건 때 탁본하여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암 이원기 처사의 14세 때 쓴 글씨라고도 전한다)

 

 

툇마루

 

 

동재. 욕인재欲仁齋 

인仁은 유교의 오상仁義禮智信에서 가져온 것일까요?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작품

모본으로 추측됩니다.

 

 

서재.유의재喩義齋

의義는 유교의 오상仁義禮智信에서 가져온 것일까요?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작품

현재 글씨는 모본으로 보입니다.

 

 

내삼문

 

 

묘우

경현사(景賢祠)

중앙에는 홍언충과 이덕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양쪽에는 김홍민,·홍여하·, 이구,·이만부·,권상일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현사에 배향된 인물에 대하여 다음,두산백과사전에서 옮겨 왔습니다.

 

우암 홍언충 寓菴 洪彦忠(1473~1508)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홍득우(洪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효손(洪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홍귀달(洪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 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 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1561~1613)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이수충(李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이진경(李振慶)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이덕형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 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그 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이덕형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1540~1594)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사담(沙潭). 김예강(金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윤검(金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 김범(金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김홍미(金弘微)의 형이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 이조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사인(舍人)에 이어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적군이 부득이 호서지역으로 통행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心經)』·『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다.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620~1674)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홍경삼(洪景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덕록(洪德祿)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홍호(洪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彙纂麗史)』·『동사제강(東史提綱)』·『해동성원(海東姓苑)』·『경서해의(經書解義)』등이 있다

 

활재 이구活齋 李榘(1613~1654)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대방(), 호()는 활재()이다.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공조정랑()을 지낸 광흡()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가 청에 항복한 후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주돈이()의 태극설()의 뜻을 이어받아 《태극도설()》을 지었고 주희(), 조광조(), 이언적(李) 등의 이기설(理)을 근거로 리() 중심의 이기이원론(理)을 주장하였다.인성() 또한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천명지성은 이가 발하여 사단이 되며 바르고 착한 길을 따르려는 도심()으로 나타나고, 기질지성은 기가 발하여 칠정이 되고 선악()을 겸하였으므로 인심()이라고 규정하였다. 시문집으로《활재집()》이 전하며 주로 성리학에 관한 글을 모은 것이다. 문경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두산백과사전)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1664~173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관징(李觀徵), 아버지는 예조참판 이옥(李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만부는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이만부는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존모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 20책 외에 『역통(易統)』 3권, 『대상편람(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四書講目)』 4권, 『도동편(道東編)』 9권, 『노여론(魯餘論)』 1권 등이 있다.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1679~175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권심(權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이달의(李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 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 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이듬 해 상소해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 해 사헌부헌납·사간원사성·사헌부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近菴書院)에 향사되었다.

 

 

전사청

전사청이 묘우 영역에 자리한 사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석조부재

강학공단 담장옆에 자리합니다.

우연하게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려진 석조부재 사진이 눈에 들어와 확인 차 찾았습니다.


여러매의 장대석.석등상대석,석등옥개석.석탑 탑신석.고맥이돌.주초 등으로 근암서원을 근자에 복원하면서 옛부재를 수습한 것 같습니다.


 

석탑 탑신석

양우주를 모각한 초층탑신석으로 추정됩니다.

현풍향교 처럼 생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우려도 됩니다.


 

옆으로 누운 상태입니다.

 

 

 


석등 옥개석

팔각이며.낙수면 물매가 깊고, 별석으로 조성된 상륜부는 망실되었습니다

 

 


석등 하대석

팔각 하대석 하단은 팔각이며, 간엽, 복련위에 2단 굄을 두었습니다.

하대석 상부에는 간주석을 꼽았던 촉공이 남아 있습니다.

 

 


석탑 면석

혼합식으로 결구한 면석으로 보았으나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고맥이돌

 


주초 

 


석탑 갑석

중앙에 얕은 홈이 있습니다.

일견 석탑 갑석으로 생각되나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부에는 부연처럼 치석된 흔적이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폐사된 절집에서 옮겨 온 부재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승사.김용사.내화리 삼층석탑.장수황씨 고택 초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조물에 관심있는 님들이라면 다녀 오시기 바랍니다.


20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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