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 순찰사 이상국경여 거사비 兼 巡察使 李相國 敬輿 去思碑 1637년(인조15년) 윤3월~1638년(인종16)2월 재임한 이경여의 비. 1638년 7월 세움
이경여(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85(선조 18)∼1657(효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이다. 아버지는 목사 이수록(李綏祿)이며,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하여 1646년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오랫만에 감영공원을 찾았다. 친구들과 모임 약속 시간이 남아 있어 잠시 비림을 둘러보았다.
비문 그보다 이수가 눈길을 잡았다.
이수 화문을 새긴 하단 중앙의 입상문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물결? 잎?
이수 측면 용이 자리하고 있다. 용우측은 유심히 살펴보면 세호 처럼 보인다. 왠 세호?
이수 우측의 용을 주목해보자 용의 꼬리.몸통.머리?
일견 몸통을 파문에 가린 머리로 추정된다.
그런데 용이 물고 있는 것은 무엇?
세호 (반대편에도 세호로 추정되는 상이 용 옆에 있다) 용이 왜 세호를 물고 있을까? 세호 잎에서 내품고 있는 문양은 무엇일까?
세호가 아니라면...
용두가 분명하다.
세호 분명 세호로 보인다.
무슨 상징인지...
이수 배면
경상감영공원 비림 훗날 비문을 모두 해석하고픈데 시간보다 짧은 지식이 문제겠지만...
그나저나 이수의 문양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2019.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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