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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대박물관.성주 법수사지 석조비로자나삼존불

임병기(선과) 2019. 1. 4.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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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박물관 야외전시장

대학박물관 중 가장 많은 석조 유물을 야외에 전시하고 있다.

 

오늘은

그간 야외에 전시중이었으나 지금은 실내로 옮긴 성주 가야산 법수사지 비로자나삼존불을 뵙기 위해 들렸다.

 

 

박물관 실내

봉화 북지리 반가상이 전시되었던 공간에 법수사지 삼존불과, 야외전시장에 있었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전시중이다.

 

 

봉화 북지리 반가상.2008년 1월

실내전시공간

 

 

야외 전시(추임새님 사진.2016년 2월)

법수사지 비로자나삼존불

 

 

 

야외전시.2013년 1월

사진 좌측 상단에 법수사지 비로자나 삼존불이 보인다.

 

 

야외전시.2013년 1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법수사지 석조비로자나 삼존불

1965년 성주 법수사지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좌우 협시보살을 봉안한 삼존으로

우협시보살은 코끼리 대좌의 보현보살,좌협시보살은 사자 대좌의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검은 빛을 띄고 있는 것은 화강암 재질 보다는 화재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통일신라 시대

석조비로자나삼존불을 조성한 사례는 경주 불국사와 법수사지 삼존불, 굴산사지에 전하며,

밀양 억만암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비로자나삼존불이 있다.

석조 코끼리와 사자 대좌에 협시보살을 모신 삼존불은 법수사지 삼존불 외에 기억나지 않는다.

 

법수사의 창건년대, 사지의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삼존불은 9세기 중반 이전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법수사지에 관해서는 아래에 예전(2012년) 글로 대신한다.



불국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 중대석(엿장수아주매 사진)

근자에 광배도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보지 못했다.



불국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 .대좌(김환대님 사진)



불국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사자좌(김환대님 사진)



불국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코끼리좌(김환대님 사진)


 

불국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광배(김환대님 사진)


 

밀양 억만암



강릉 굴산사

한 분은 어디에?



굴산사.영정각

불두는 후보작이다.

즉.범일국사상으로 모셨으나, 개인적으로는 비로자나 삼존불의 좌협시불로 생각한다.



굴산사 영정각으로 옮기기 전 굴산사지의  비로자나불로 추측된다.


 

법수사지 비로자나불좌상

두 손의 형태로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로 추정한다

 

대좌

상.중.하대좌를 갖추었으며, 본존 광배로 추정되는 광배가 남아 있다.

 

 

 

상.중.하대석

 

 

하대석

팔각의 상부에는 2단 굄을 조출하였고, 단판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중대석

팔각연화대좌에 모를 죽여 원형 처럼 보이며.

각면에 운문과 사자를 새겼다.

이런 작례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팔공산 동화사 비로자나불,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 법수사지 인근의 성주 금봉리비로자나불에서도 나타난다.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불좌상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불좌상 대좌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중대석 사자상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863년)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 대좌

 

 

법수사지 비로자나좌상

 

상대석

복판 복련을 새겼다.

 

 

대좌

 

 

비로자나불좌상

불두가 결실된 상태이다.

8세기의 당당한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어깨의 당당함이 사라진 모습이며,

결가부좌, 법의는 통견으로 추정된다.

 

 

 


배면 

 


광배

비로자나불 광배로 추정

 


훼손된 부분이 많지만 주형 거신광으로 추정

두광과 신광을 겹동선으로 구획하였다.

 


두광

중앙에 연화문, 안에는 덩굴문을 새겼으며, 바깥에는 운문과 화불을 봉안하였다.

 


거신광 안쪽의 덩굴문

 


두광 좌우측에는 화불을 모셨다.

 


개인적으로는

거신광배 상부중앙에는 삼존불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성주 금봉리, 괴산 각연사.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 광배에 그 작례가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 참조)

또한 불상은 없고 광배만 남은 성주 심원사. 밀양 영원사지.창녕 사리의 불상도 비로자나불로 추정한다.

특이하게도 영덕 관음사의 광배는 좌우에 삼존 화불을 봉안하였다.



성주 심원사.



밀양 영원사지



밀양 영원사지



창녕 사리



창녕 사리

 


영덕 관음사


 

 

 

 


우협시보살 대좌

장방형 하대석, 중대석은 코끼리 대좌, 원형의 상대석을 올렸다.

상대석 위에는 보현보살 좌상을 봉안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코끼리

훼손되었지만 긴 코가 보이며, 다리도 분명하다

 


측면

 


측면

 

 


상대석

상부에 광배 촉공이 있다.

 


상대석

하부에는 앙련을 표현하였고, 아래에는 여의문을 조식하였다.

  


성주 법수사지 지근 심원사의 광배

법수사지에서 수습한 광배로 알려져 있다.

혹 심원사의 광배가 법수사지 협시보살의 광배는 아닐까?

자세히 보면 검은색이 짙어 법수사지 비로자나삼존 처럼 역시 화재로 인해 변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도 그렇고, 심증은 가지만...

 


 코끼리좌


 

코끼리좌와 보현보살좌상

 


파손이 심하며 우견편단 법의로 보인다.


육안으로 구분이 어렵지만.

"목에는 목걸이가 있으며 군의를 입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지민.신라하대 비로자나삼존불상의  양식 특징과 조성 배경에 관한 고찰(2018). 불교미술사학 26집)


화재가 발생하였을때 들고 나온 듯 본존과 달리 하얀색이다.

 


배면

 


측면

 


전면

 

 


좌협시보살

사자좌로 미루어 문수보살을 모셨을 것이다. 

원형 상대좌는 망실되었다.



성주 심원사. 대좌와 석불

역시 법수사지에서 수습된 대좌와 불상

혹 불상이 문수보살상 아닐까?

심원사에는 이 대좌 외에도 대좌와 비로자나불이 한 분 더 계신다.


역시, 심증은 가지만...

 


사자좌 

 


머리는 결실되었고

갈귀가 있고, 목과, 배에도 장신구를 걸쳤으며 등에는 안장처럼 복련을 중앙에 새기고 아래에는 등을 보호하는 덮개를 새겼다.

 


갈퀴.목과배의 장신구. 등의 복련이 확연하다.

 

 


측면

 


측면

 

 

 


법수사지 석조비로자나삼존

9세기 중반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의 작례가 많지 않은 석조비로자나불 삼존이며,

또한

불국사와 더불어 법수사지에만 남아 있는  협시보살의 석조사자좌, 석조코끼리좌를 갖춘 삼존불이다.


성주 법수사지

안태고향이 아니더라도 성주군에 조성중인 역사공원으로 옮겨갔으면 좋으련만...

 

 

2019.01.03

 

아래

법수사지 글(2012년)

 

 

법수사지. 신라 애장왕 3년(802년) 때 창건되어 임진왜란에 폐사된 사찰로 전해온다. 삼국유사 신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범우고 경산지 등의 고도서에도 가야산 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법수사지는 1996년 발간된 성주군지에는 금당사터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신라 패망 후 범공(경순왕의 아우 김황) 스님이 법수사에 들어가 해인사를 드나들면서 주석했던 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사지총람에는 법수사 퇴락 후 금당사가 들어서 1700년까지 사세가 이어졌다는 글이 보인다.

 

 

법수사는 구금당 팔종각 등 1000칸이 넘는 전각과 10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현재는 삼층석탑. 당간지주 금당지 석축이 유존하며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에 부재들이 산재해 있고, 도은암 보현암 백운암 일요암 등 암자터가 전한다. 법수사지에 봉안되었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백운리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용기사가 폐사되어 1897년(고종1년)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범운선사에 의해 해인사 대적광전 주불로 안치되었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사원전 답 1.386평 등 100여필지 20,000평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용기골 미륵당에 있던불상은 경북대로 옮겨졌고 중기마을에 있었던 목이 결실된 불상은 백운초교를 거쳐 심원사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법수사 목조비로자나불....해인사 대적광전

 

법수사 용기사를 거쳐 해인사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성주에서는 재미난 전설이 전해온다. "용기사에서 고개를 넘어 해인사로 비로자나불상 등을 옮겨 모시던 중 갑자기 불상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 범운 스님이 직접 달려나와 예불을 올리자 불상이 다시 움직였다." 해인사로 불상을 옮겨 모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성주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든 전설이리라.

 

조선고적도보

 

2010년 보물로 지정된 석탑은 2기단, 3층으로 상륜에는 노반만 보인다. 아래 기단 네 면에는 3구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갑석은 4매의 부재이다.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  탱주를 새겼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에 양우주를 모각하였다.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5단, 네모서리는 반전되었고  풍탁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말 조선초. 유학자들이 법수사를 많이 찾은 듯하며 시도 여러 편 전해온다. 이지누님은 사'절터 톺아보기'에서 그시절이 법수사의 전성기로 짐작하고 있다. 이지누 글에 보이는 시를 보자.

 

고려 말과 조선 초를 풍미한 독곡(獨谷) 성석린이 이곳 법수사를 찾아 글을 남겼는데 마지막 두 구는 망실되었다. 그래도 읽어보면 “푸른 물은 문 앞을 흐르고/ 절 뒤로는 높은 봉우리가 둘렀구나/ 봄이면 붉은 꽃 안개처럼 가득하고/ 여름이면 초록빛 나무들이 빼곡하네/ 눈앞은 삼천리나 열렸고/ 하늘 끝에는 수많은 봉우리가 첩첩하네”라고 했으니 그 또한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정경에 넋을 잃은 듯 하다.

 

독곡선생과 동갑나기인 척약재(若齋) 김구용은 ‘제가야산법수사’라는 시에서 “종일 말을 타고 덤불숲을 헤치며 왔더니/ 온 산 가득한 누각의 문은 구름에 맞닿아 열렸네/ 들은 지는 오래나 처음 이곳을 찾으니/ 한발 내 디디기가 어려워 말머리를 아홉 번이나 돌렸네”라며 법수사가 높고 험한 곳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기단. 하기단이 유난이 높다.

탑신

석등대좌

불상대좌

불상대좌

금당지 석축

금당지 석축

 

지금은 백운동 순환도로 개설로 탑을 먼저 답사하지만 예전에는 당간지주가 있는 중기마을이 법수사 진입 동선이었을 것이다. 사찰은 폐사되고 당간지주는 당산목과 더불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민초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얼마전까지도 동제 후 걸어둔 금줄이 보였는데 이제는 매년 제를 올리지 않은 듯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당간지주를 장군 젓가락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간 지주는 거의 손상 없으나 기울어진 상태이다. 안쪽 면은 장식 없이 수직으로 깎아 다듬었고, 상부에는 당구를 마련했으며 바깥 면은 올라가면서 3단으로 구분하여 체감하도록 했고 상단은 크게 호형을 그리면서 모죽임 했다.

 

 

연화문이 뚜렷한 배례석이 보인다.

 

예전 답사에서도 보았던가?

 

 

 

등법수사남루登法水寺南樓...이직

(이직...성주 출신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예전에 한 번 오른 적이 있고, 오늘 다행히 거듭 오른다.

 

두 손 마주 잡고 읍을 함은 기이한 경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요,

 

쉬이 떠나지 못하고 주저함은 고의(古意)가 깊기 때문이네.

 

시냇물은 돌 절벽에 놀라고, 빗(雨) 기운은 먼 멧부리에서 나온다.

 

뜻이 통하는 스님 친구가 있어서 근심이 있을 때 더불어 시를 읊조릴 만하네.

 

201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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