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 등대 국내에서 2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 년초 일출맞이가 아니더라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침략의 상징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수산실습선 쾌응환 조난기념비(水産講習所 實習船 快鷹丸 遭難紀念碑)
등대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우리에게는 낯선 단어인 "쾌응환" 조난기념비. 1907년 수산실습선이 좌초하여 인명사고를 당한 후 1926년 일본인들이 세운 비이다. 해방 이후 도괴되어 방치된 비석을 두어번 자리를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쾌응환 좌초를 빌미로 호미곶등대를 설치하고, 오늘 날 처럼 조선근대화를 외치며, 경북 동해안의 수산물.농산물.임산물, 경주에 산재해있던 무리 문화재까지 구룡포 항구를 통해 수탈해 가기위한 기반시설로 조성하였을 것이다.
(종화님 사진)
OO 사십년 9월9일 조난 순직자 기사 길영귀인랑, 생도 지야중세, 동구미천유일, 동삽곡유삼 OO 四十年 九月九日 遭難殉難者 技師 吉永貴八郞, 生徒 池野仲歲, 同 久米川有一, 同澁谷育三
위의 두글자는 해방후 우리나라 사람이 훼손한 명치(明治) 이다. 즉, 1907년 9월 9일 사고가 발생하였다.
반대편 명문 OO 십오년 9월9일 건, 발기자 당시 승조직원급생일동 OO 十五年 九月九日建, 發起者 當時 乘組職員及生徒一同
훼손된 두 글자는 대정(大正)이며, 대정 15년은 1926년이다. 쾌응환이 조난 된 후 20년이 지나 같은 배에 승선하였던 승조원과 실습생들이 세웠음을 알 수 잇다.
"광무(光武) 5년(190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진출의 기반을 다질 즈음 당시 일본수산실업 전문대학교 실습선이 대보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몰살하였는데 일본은 이 사건이 한국의 해안시설 미비로 발생하였다고 하며, 해난사고 발생책임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여 건립케 되었으며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1908년 4월 13일에 착공하여 1908년 11월 19일에 준공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점등하였다.
등대 년초이면 저마다 바람을 기원하며,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우리는 즐기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 역사의 이면을. (종화님 사진)
2019.0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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