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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시

포항...서운암 아미타탱.신중탱.동종

by 임병기(선과) 2019.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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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암

1215년 원진국사가 보경사를 중창할 때 산내의 아홉 개 암자의 하나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1662년 보경사 중건 때 서운암도 함께 중건되었고, 1898년 중수하였다고 전하다.


예전에는 출입이 자유로웠지만, 지금은 항상 열려있지는 않다,

더구나 부도전 주변은 철펜스로 인해 서운암을 경유하여 들릴 수 있어 사전에 답사 허락을 받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아미타삼존.후불탱

개인적으로는 서운암을 여러번 들렸지만 법당 출입은 처음이다.

아미타삼존을 봉안하고 아미타 후불탱을 모셨다.


아미타탱

흔치 않은 선묘불화로 아미타 좌상을 주불로,  협시인 관세음,대세지보살 입상, 그 양측으로 반가좌형의 문수와 보현보살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는 아난과 가섭을 포함한 6위의 나한이 상반신만 드러내고 있다.


1879년에 수화승 하은당 응상(霞隱堂 應祥)이 7명의 보조화승을 이끌고 그렸다.

금어 하은 응상은 19세기 후반 경상북도,충청북도 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사불산파(四佛山派)의 대표 화승이라고 한다. 

 

 

신중탱

신중도는 화면 중앙에 갑옷을 입고 깃털 장식의 투구를 쓴 위태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석천, 범천이 위치하고, 천부상의 전후로 4위의 신장상을 비롯하여 천자와 동자 각 2위씩 배치되었다.


아미타탱과 함께 조성되었다.


 

(2018년 12월 5일 촬영)

서운암 부도전 글 참조 요

 

부도전을 거쳐, 그간 인연 짓지 못 했던 박물관에 들려 서운암 동종과 불화 몇 점을 만났다.

 

 

비사리 구시

 


서운암 동종


경상도 자인현 지동령구룡산 반룡사 중종 강희6년정미칠월일

연화질 화원 사인 태행 부 도겸 담연

慶尙道慈仁縣 地東岺九龍山 盤龍寺 中鐘 康熙6年 丁未7月日 . . .

緣化秩 畵員 思印 太行 副 道謙 淡衍...


즉, 1667년 경산 반룡사에서 사인비구를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이 주조하였다.


(자인현 반룡사에 관한 답사기를 이 글 아래에 실는다) 

 

 

서운암 동종

짙은 녹색을 띄고 있으며, 크기는 작은 편이다.

천판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다.

종뉴는 오메가(Ω)형태이다.

음통 대신 홈을 내었다.


입상화문대에는 비구(?) 상대에는 연화당초문을 둘렀다.

종신에는 4개 유곽속에 5개 유두를 표현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범자를 2개씩 총 8개 부조하였다.

그리고 하대에는 덩굴문을 새겼다.


 

천판.상대


 

중대


 

하대


 

오메가(Ω)형 종뉴


 

사인비구의 작품으로 알려진 범종

 

1.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 동종
2. 양산 통도사 동종
3. 안성 청룡사 동종
4. 강화 동종
5. 서울 화계사 동종
6. 의왕 청계사 동종
7. 문경 김룡사 동종
8. 홍천 수타사 동종


 

칠성탱

화기에 의하면 1954년 보경사 청련암에서 제작되었다.

상단 중앙에는 금륜을 받든 치성광여래가  앉아 있으며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좌우로는 칠성여래,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셨으며, 수성노인도 보인다.

하단에는 자미대제를 모셨다.

남극성 수성노인과 북극성인 자미대제는 칠성여래 뒤쪽에 서로 마주 보고 모시는 경우가 많다.

 

 

 

 

화기

세존응화 2981년. 보경사 청련암.금어 운암


 

신중탱

화기는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를 검색하면 가경 오년 경신년에 제작된 탱이다.

嘉慶五年 庚申 1800(정조 24)

부부가 다음 생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한다.

 

 

원각대선사

(영정 사진이 승려 모습이 아니다)

1847(헌종 13), 금어 법준,순언의 작품으로 내연산 성도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원각조사비...출처/한국 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2007년 올렸던 원각조사비문 글)

 

() (1379~1459) .
2 26(1648) .
, .

. 3 . .

(2007.01.21)
(2007.01.21)

淸河 常泰寺圓覺祖師塔碑
圓覺祖師碑銘(篆 題)
祖師諱摩訖其先金氏新羅蔓城人也先子諱白光母失係出名曰淨德夢日月燈光射于地挹而納」
懷仍而有娠洪武十二年己未二月十五日申時生是時始雨二七而止若有神者抱送焉生而不啼」
不煩保母庚午丁父憂若啞不語十五癸酉秋七月晦朝見海旭如盤初出忽發笑曰大哉陽之精也」
從此語笑自若精神如氷玉語音如笙篁聞者皆喜若居酷熱飮氷也丙子値母服闋至己卯娵野城」
劉氏女耕鑿而己處世油水利不干懷常謂曰大空寂性血氣皆具瞥爾囘觀卽在斯焉云何逐物之」
忙而不囘首自思嗟爾浮生薾然疲役而不知其休▨曰赫赫日中盲者不覩淸淸水中遊魚自迷非」
汝之謂乎凡語言遊戱每如此天順三年己卯六月十五日申時召優婆夷妙正曰吾滅後一年此驛」
當設官立員又至百三十許年海醜入邦國喪據山河骨暴血流千里西兵來援天下騷亂我境晏」
然天神呵禁民保其元歲漸飢荒將毁道場先占斷隴搆一淨堂置我醜影香火跪  欽觀音妙音聖號」
常誦則弭灾滅禍自成仁壽之域汝其傳道各令盡心物有其始必有其終示無常處是眞常也言訖」
泊然坐化壽八十一道流依空門法茶毗收舍利樹浮屠於此縣西常泰寺是日天氣酷熱忽瑞雲盤」
空若寶盖之覆陰鳴呼韙歟」 
順治五年戊子四月 日立

청하(淸河) 상태사(常泰寺) 원각조사탑비(圓覺祖師塔碑)
원각조사(圓覺祖師) 비명(碑銘)(전자(篆字)로 씀)

(2007.01.21)

조사의 이름은 마흘(摩訖)이고 선조는 김(金)씨로 신라 만성(蔓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백광(白光)이고 어머니의 가계 출신은 알 수 없는데 이름은 정덕(淨德)이다. 꿈에 해와 달과 등불 빛이 땅을 비추므로 끌어당겨 품안에 거두었다. 이에 임신을 하여 홍무(洪武) 12년 기미년(우왕 5, 1379년) 2월 15일 신시(申時)에 낳았다. 이 때 비가 오기 시작하여 14일 만에 그쳤는데 귀신이 품고 있다가 내보내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울지 않았고 보모를 고생스럽게 하지 않았다.

경오년(공양왕 2, 1390년) 아버지가 돌아가자 벙어리가 된 듯 말을 하지 않았다. 15세가 되는 계유년(태조 2, 1399년) 7월 그믐날 아침에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니 쟁반이 막 나오는 것 같았다. 돌연 웃으며 말하기를 “크구나! 태양의 정기여”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말과 웃음이 태연자약하고 정신은 얼음과 옥처럼 맑고 깨끗하였다. 말소리는 생황과 같이 울려서 듣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니 푹푹 찌는 더위 속에 얼음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병자년(태조 5, 139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기묘년(정종 1, 1399년)에 이르러 상을 마쳤다.

야성(野城)의 유(劉)씨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밭을 갈고 샘을 파며 살았을 뿐이다. 세상살이가 물과 기름처럼 맞지 않아 이익에 간여하거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평소 말하기를 “크고 공적(空寂)한 자성(自性)은 혈기 있는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어 언뜻 이렇게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도다. 어찌 현상을 쫒느라 바빠서 머리를 돌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가? 아아! 너희 중생들이여. 고달피 일에 지치고 피곤하면서도 그만둘 줄 모르는구나. 붉게 빛나는 햇빛 속에서도 눈 먼 자는 보지 못하며 맑고 깨끗한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도 스스로 헤맨다 하더니 너희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보통 하는 말과 유희가 매양 이러했다.

천순(天順) 3년 기묘년(세조 5, 1459년) 6월 15일 신시에 여자신도 묘정(妙正)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입적하고 1년 후에 이 역(驛)에 관청이 설치되고 관원이 두어질 것이다. 또 130여년 지나면 바다의 오랑캐가 침략해 들어와서 나라가 의지할 곳을 잃게 되고 산과 강은 뼈가 드러나고 바짝 마를 것이며 피는 천리를 흐를 것이다. 서쪽의 군대가 와서 천하의 근심과 어지러움을 구원하여 우리 강역이 평안해 질 것이며 하늘의 신이 꾸짖고 금하여 백성은 그 근본을 보존할 것이다.

갈수록 점차 기아와 흉년이 되어 장차 도량(道場)을 훼손시킬 것이니, 우선 가파른 언덕배기를 차지하여 정당(淨堂) 하나를 세우고 내 못난 영정을 안치하여 향을 사르도록 해라. 관음(觀音)보살과 묘음(妙音)보살에 무릎 끓고 공경하면서 항시 그 성스러운 존호를 읊으면 재앙이 그치고 화가 없어질 것이며 저절로 인(仁)과 장수(壽)의 경역이 될 것이다. 너희는 도를 전수함에 각기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만물은 그 시작이 있고 반드시 그 끝이 있으니 무상(無常)을 보이는 곳이 바로 진상(眞常)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앉은 채 입적하니 나이 81세였다.

도반[道流]들이 불교의 법에 따라 다비를 해서 사리를 거두어 이곳 현(縣)의 서쪽 상태사(常泰寺)에 부도를 세웠다. 그 날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서리면서 마치 보배로 된 덮개가 그늘을 드리운 것 같았다. 오호 아름답도다!
순치(順治) 5년 무자년(1648년) 4월 일에 세우다.

 

 

청동금고.조선후기

 

 

청동 바라.조선후기

 

 

서운암 동종

인연 지었음을 감사드린다.


2019.01.19

 

경산 반룡사(2016.02.22)

 

청도 대운암 목조보살좌상 답사 후

목조보살상과,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의 안태고향

경산 반룡사를 다녀 왔다.


그런데

대구 근교에 위치한 사찰임에도 지금까지 왜 인연을 짓지 못했을까?


           


청도 대운암 목조보살좌상(1654년 반룡사에서 조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사인비구의 동종도 1667년 자인 반룡사에서 주조 되었다.



 

잔뜩 찌뿌뚱한 날씨

사람이 그리운 듯 작은 멍보살이 유난히 반겨준다.


 

작은 절집으로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주지스님의 공덕이 가람 가득 베여 있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조까지 향화를 피운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어 폐사되었으나 임란후 17세기 중후반에 대대적인 중창복원 불사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사인 비구의 보경사 동종, 대운암 목조 관음보살도 17세기 중창시에 조성된 듯하다.

아울러

대운암 목조관음보살상은 반룡사에서 도난당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협시보살로 추측되며 함께 조성했을 협시보살인  대세지(지장보살)보살상도 어딘가에 모셔져 있을 가능성이이 충분해 보인다.


 

山居산거 - 이인로李仁老(1152~1220)

 

春去花猶在(춘거화유재) : 봄이 가도 꽃은 오히려 남아 있고,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 하늘 개여도 골짜기는 저절로 그늘지네.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 두견새 대낮에 지저귀니,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 깊은 골짜기에 사는 것을 처음 알았구나.


*이인로가 반룡사에 머물면서 지은 시조

 

 

사전에 인지한 석조 부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답사 말미에 만난 스님에 의하면 반룡사 불사중에 수습한 부재이며, 절 주변의 과수원, 마을 담장에 많은 석조부재가 산포해 있다고 하였다.


 

석조


 

반룡사 사적비 비좌



대웅전 축단석(조선시대)

금방 몇몇 사찰 기단이 파노라마로 스쳐간다.


대웅전 기단의 고식 기단 작례를 살펴보자


 

통도사 대웅전 기단(달넘새님 사진)



해인사 원당암



문경 대승사



동화사 금당선원



청도 대적사


청송 대전사



영천 거동사



울진 불영사


위 작례 외에도 몇몇 절집 더 있지만 기억의 한계로 략한다.



기단 축단석


 

이부재는 축단석?

우측부분은 치석이 고르지 못하여 매몰된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당간지주, 또는 괘불지주로 보이지만 길이가 너무 짧다.


 

 

 

대웅전 축단석

그런데 위의 조선시대에 조성한 축단석과 달리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표기하였다.

왜일까?

 

 

 축단석을 세운 모습이다.


 

윗사진 회전 모습

역시 축단석 입니다. 

 

  

 

부도비?


 

석등 부재


 

  

 

 

 

 

석탑 지대석?


 

석탑지대석 여부는 불분명해 보인다.(조선시대)

 

 

고려시대 삼층석탑 하대갑석?

연화문이 조각된 부재를 뜻하는 것 같다.

기단갑석이라면

면석과 일석으로 조성된 단층기단의 갑석 일 것이다.

 

 

기단갑석 상부에 복련의 탑신괴임과 각형 괴임일까?

각형괴임은 괴임대 기능과 위쪽에 얹여져 있는 부재의 이탈 방지를 위한 기능은 없었을까?


 

 

설명문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석조부재를 조합해보자


1.석탑재

여러장의 지대석(조선시대 표기)위에 기단면석과 갑석(고려로 표기)이 일석으로 조성된 단층기단이며  탑신괴임은  연화문과 각형의 2단 괴임이다. 탑신석 위의 부재는 결실 되었다.


2.연화문 면석

대웅전 축단 기단석이다.


3.기타

석등 부재.부도 부재. 비석 부재 등등이다.



문득

우리카페 달넘새님이 일전에 글을 올린  언양 운흥사지 부도재가 스쳐간다.


그래서

석조부재 몇개를 조합해보자.


위사진에서 복련이 조식된 하기단 갑석이라고 한 부재위에 여러 조각이 남아 있는 대웅전축단석을 올려 놓으면 운흥사지 부도재와 비슷하지 않은가?


에혀

한심한 중생아!

뭘 얻겠다구 이렇게 머리를 굴리냐!!!




 

 

입구의 부도전

답사 말미에 만난 스님께서는

반룡사 주변에 많은 부도재가 산포하고 있다고 했다.

 

 

용파당대사옥휘탑 龍坡堂大士玉輝塔(1741년)

 

 

 

 

 

성당태민대사탑비 法性堂太敏大師塔碑

탑신에는 뒷면에는 기해년.법제자. 법손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육안으로 구분은 쉽지 않았다.

 

 

문화 강국,선진국의 잣대는 무엇일까?

더 늦기전에 시작해야 할텐데.

내기준이 옳지는 않겠지.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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