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만년교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있는 홍예교로, 주변에는 영산 석빙고, 구계리 석불좌상, 법화암 다층청석탑. 보림사지부도, 삼층석탑, 신씨고가, 관음사 석탑, 미륵불 등이 지근에 있다. 오늘은 얼마전 페친이 포스팅한 비석군의 불상대좌, 신씨고가의 노두석을 뵙기 위해 들렸다.
보물 제564호. 만년교는 1780년 축조한 홍예교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년교, 남산(南山)인 함박산(咸朴山)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에 놓인 다리라고 하여 남천교(南川橋), 다리를 놓은 원님의 공덕을 기리고자 원다리로 불리운다고 전한다.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 남천 석교(南川石橋)가 세워진 곳은 처음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던 자리였다. 그래서 큰 비가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무너져 매번 물을 건너는데 애로가 있었으므로 경자년(1780년, 정조 4) 3월에 고을에 사는 김윤관(金允寬)이 현감(縣監)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모으고 다른 산의 돌을 깎아서 이 다리를 축조(築造)한 것이다. 비문에는 남천 석교의 축조한 이유와 축조를 위해 재물을 내고 역사(役事)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南川石橋序幷銘」 남천 석교서(南川石橋序) - 병명비(幷銘碑)
하루는 고을의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도모하기를, “다리를 오래 보존하고 물의 흐름을 제압할 방법으로는 돌을 깎아서 다리를 만드는 방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고을에 사는 김윤관(金允寬)이 현감(縣監)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모으고 다른 산의 돌을 깎아서 이 다리를 축조(築造)하여 몇 개월 만에 그 일이 완성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로서는 물을 건너지 못할 근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고을에서는 물을 진압할 방법이 있게 되었으며, 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쇠하지 않는다.
大施主幼學南朋溟」
대시주(大施主) 유학(幼學) 남붕명(南朋溟)
영산 만년교비(靈山 萬年橋碑)
조선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가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 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놓았으며, 이러한 사실을 남기기 위해 1892년에 세운 만년교비이며, 13세의 소년이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萬年橋(만년교) (...)歲書 ( )안의 박락된 부분이 十三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13세 소년이 썻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가문의 13세손이 썼다는 의미는 아닐까?
2019.01.13 (남천석교 명문과 해석은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소 옮겨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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