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
대구시민들에게는 휴식 공간 으로 자리잡은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유치원, 초교시절 누구나 한번 소풍을 다녀왔을 것이다. 청동기시절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조선조에는 잠시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신사가 자리하기도 했었다.1970년 동물원이 개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떤 분의 시각인지 또다른 목적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동물원을 하루 빨리 옮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동물원 이전 지역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확정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달성공원에는 현재경상감영 정문이었던 관풍루가 1906년 대구읍성 철거시 이건되었고, 향토역사관도 개관하여 우리문화유산과 향토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공원내에는 희귀목과 노거수를 포함 향나무 등 60종 5,000여 그루의 교목류와 광나무 등 23,000여 그루의 관목류가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대구향토역사관
"대구는 신라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재위)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 (達弗城)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城廓)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29년 (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대구 시청
사진...대구향토역사관 1913년 달성(達城) 사진. 경주월성처럼 토성임을 알 수 있다.
흰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 옆으로 토성 앞에 개울이 보인다. 최근에 복개하기전 해자 (垓字)처럼 개울이 있었다.
사진...대구향토 사료관
1923년 사진 파헤쳐진 달성고분군이 보인다. 사진 상단의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신라에 합병되기전 지배계급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현재 성벽 토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7~80년대 대구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이 어린 곳이다. 복개도로가 개설되기전...
서문 오늘에야 서문 개설을 알았다. 달성 전체에서 유일하게 토성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달성공원 나들이 작년에 결혼한 딸내미. 집사람이 안고 있는 둘째 놈이 금년 서른이다. 대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분이라면 달성공원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石州李相龍救國紀念碑).1963년 5월 세움 이상룡(1858~1932)..다음백과에서 발췌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이상희(李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이계원(李啓元)으로, 이어서 이상룡(李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이승목(李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봄 의병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이상룡을 지지하는 데모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3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을 개최해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협회도 해산당하였다. 1910년 11월 주진수(朱鎭洙)·황만영 등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전해 들었다.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한 뒤 2월 서간도 회인현 항도천(懷仁縣恒道川)에 도착, 심택진의 집에서 김대락(金大洛) 등과 약 2개월 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를 연구, 집필하였다. 1911년 4월 봉천성유하현(柳河縣)으로 이동하고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동시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김대락 등에 의해 경학사장에 추대되었다. 특히, 항일민족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 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3년 5월 요령성(遼寧省) 의회에서 재만한인의 토지소유전매조차금지안(土地所有轉賣租借禁止案)이 가결되었다. 이상룡은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을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4년 「존화양이변(尊華壤夷辨)」을 발표해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에는 길림(吉林)의 총독과 재만한인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5월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같은 달 신흥중학교(신흥강습소의 후신)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 독판(督辦)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관전현(寬甸縣) 삼도항(三道港)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 그 해 4월에는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상해·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서간도반석현(磐石縣) 호란하(呼蘭河)로 돌아와,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5월 병으로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왕산허위선생순국기념비(旺山許蔿先生殉國紀念碑). 1962년 10월. 박정희 의장이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왕산 허위(1855~1908).다음 백과에서 발췌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 경상북도 구미 출생이다. 유문(儒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을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41세 되던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1896년 2월 10일(음력)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이기찬을 대장으로 금산(金山)·성주를 거점으로 대구부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대구의 관군이 급히 출동하고 이어 경군(京軍)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성주가 무너지고 이은찬 등 일부 장령이 사로잡혔다. 그 뒤 의병진에서는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재반격을 준비 중이었으나, 이 때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명령을 받은 허위는 그만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1899년 2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 원구단 참봉(圜丘壇參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 곧 성균관박사, 1904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국정 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 판서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勅任官) 2등으로 서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양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柳麟錫) 등 여러 지사들과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새로이 보국을 결의하고 9월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가을에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하여 13도의병연합부대(十三道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이때 이인영(李麟榮)이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이 되고 그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연합부대가 대오를 정비, 서울로 진격할 때, 정병 300명의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속부대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각처로부터 밀려오던 의병부대를 개별적으로 타격을 가하였다. 이 때 그도 갑자기 몰려온 일본군과 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후원군이 없어서 패하고 말았다. 당시 총대장인 이인영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중책을 맡게 되자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새로운 임진강의병연합부대(臨津江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의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한 이곳 일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에 소요되는 모든 군수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의병연합부대의 전법은 유격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적성 방면의 의병 5,000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무기를 제조하였다. 4월에는 보다 광범위한 힘의 결집을 도모하기 위해 이강년 등과 함께 전국의 의병부대에 통문을 보내고,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30개 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다.새로운 항일전의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중,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유동(柳洞)이라는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51세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달성서씨 유허비.죽농 서동균의 글씨. 유허비 조성 배경....출처/달성서씨종친회 달성서씨유허비를 세울 것을 논의한 것은 1966년 가을 서원 향사시에 산격동 대종회에서 결의 되었다. 종중의 자금사정 관계로 산격 徐錫采(서석채)씨께서 전국 일가들을 찾아 모은 쌀(米)뿐이었고 이자(利子)로서 겨우 가을 향사비를 사용하고 종금이 없었다 대종회 요원들이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산격 錫采(석채),상주 錫永(석영),경주 相煥(상환),영천 鍾舜(종순),가천 鍾奭(종석),제천 鍾碩(종석)등 원로 요원들이 일금 70 여만원을 모금하였으나 부족한 자금이였었다. 대종회에서는 유허비 기록 문제에도 물의가 있었다. 1970년가을 향사시에 대구 서울등 능력있는 일가에게 찬조를 받았고 비를 운반하는데도 애로가 많았는데 대구 근교에 있는 공병대와 교섭하게 되어 중장비를 동원하였다 그당시경북도경국장 서재근씨의 도움이 많았다. 1971년 3월 23일 유허비 준공식이 있었다. 기초공사를 마친후 龜趺(귀부)를 얹고 그위에 10尺(척) 碑身(비신)을 세웠다. 달성 서씨 문중에서 달성에 유허비를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서침(徐沈) 나무. 달성공원에 있는 회화나무로 서침나무로 명명되어 있다. 서침(徐沈).다음백과사전에서 발췌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均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 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서침은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 세곡을 되돌려 받을 때 운반이나 동물의 해로 손실되는 양을 추가한 양)을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상화시비(尙火詩碑) 우리나라 최초(1948년)로 세운 시비. 이상화(1901~1943).다음백과사전에서 발췌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夢幻病)」(개벽, 1925)·「비음(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개벽, 1925)·「통곡(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비문 이상화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부친 이시우공의 제2자로 태어나 서기 1943년 3월 22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 출생지요 종언지이다. 그의 시력은 <백조>동인시대에 시작되었으니 향기롭고 분방한 그 시상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청신한 일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역천><이별> 등이 있으니 비면에 새긴 시구는 <나의 침실로>의 1절이다. 흘러간 울(?)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이 아니로되 시인의 조잘(?)한 생애를 추모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적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시비에 관여한 인물들이 대단한 면면들이다. 무자 정월 戊子 正月 김소운 金 素雲 제첨 위창 오세창 84세 題簽 葦滄 吳世昌 八十四歲 書 시구 유윤 3자 태희 11세 詩句 遺胤 三子 太熙 十一歲 배명 죽농 서동균 서 背銘 竹農 徐東均 書
1948년 戊子 二月 建立
석재 서병오선생 예술비石齋 徐丙五先生藝術碑.1983년 세움
서병오(1862∼1935).다음백과사전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석재(石齋). 영남출신으로 일찍이 군수를 지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민영익(閔泳翊)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그의 소개로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중국인 서화가 포화(蒲華)·오창석(吳昌碩)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9년도 상해와 일본을 여행하였고,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특히 포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의 문인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기(文氣) 짙은 묵죽(墨竹) 등 사군자를 그리게 되었다. 글씨는 매우 격조 있는 행서(行書)를 남겼다.
대구에 살면서 영남일원의 대표적 서화가로 최대의 명성을 누렸다. 1922년 대구에서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畫硏究會)를 발족시켜 회장이 된 뒤, 서화연구생들을 지도하였다. 서동균(徐東均)과 성재휴(成在烋)가 그 시기의 그의 제자이다.
1922년부터 서울에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鮮展)가 열리게 되자 박영효(朴泳孝)·정대유(丁大有)·김돈희(金敦熙)·김규진(金圭鎭) 등과 더불어 ‘서(書)와 사군자’ 부심사위원을 여러번 역임하였으나 한번도 작품을 출품하지는 않았다.
죽농서동균선생예술비竹儂 徐東均先生藝術碑.1983년 세움 비는 죽竹을 형상화한 조형물 같음
서동균(1902∼1978).다음백과사전 호는 죽농(竹農, 竹儂). 대구광역시 달성 출신. 가학으로 한문과 글씨를 배웠다. 3·1운동 때는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세 때 서병오(徐丙五)에게 서화를 사사하였다. 조선서화협회전에 3회 입선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연 8회 입·특선하였다. 한때는 일본에도 체류하면서 그곳의 작가들과 교류하였으며, 40대 때는 경북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였다.
50세 때 스승이 운영하던 교남서화회(嶠南書畫會)를 물려받아 영남서화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58세 때 해동서화회를 창립하였다.
1975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고, 그해 재야작가로는 처음으로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글씨는 황산곡(黃山谷) 등을 곁들인 행서가 주류이며, 그림은 사군자가 돋보인다.
대신사수운최재우상
비문.다음블로그/무애동천 동방에 신인이 나시니 괴로운 어둠속에 기쁨의 밝은 빛을 펴시도다. 겨레의 정기가 들어남이어 만고의 진리가 환연하도다. 옷깃을 여미고 다시금 우러러 보라.
거룩하신 그 모습 따스한 손길로서 깨우치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사람이 곧 한울이오 사람마다 마음속에 모신 한울 존엄도 한울시고 너도나도 동귀일체(同歸一體) 분발인들 못할소냐참된 마음 고이지켜 공경하고 믿는데서 바른기운 생기나니 뒤졌다고 낙심말고 남의 힘에 의존마세 나에게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 그렇고 그런이치 무궁한 천지조화 다름아닌 내것이라. 새로운 삶의 길이 눈앞에 열리도다 .
스스로 서지 못하고야 강산의 주인구실 어찌하며 스스로 믿지 못하고야 남의 신의 바랄손가. 급급한 세상사람 선각자를 몰랐어라. 갑자년 3월 10일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불멸의 그 얼이어 한울과 더불어 길이살아 창생을 제도하니 이 겨레의 자랑이자 나의 영광이 아닌가.
밝음은 바로 그대 마음에 비치도다. 고요한 감격에 잠겨 나갈길 더듬는 그대에게 새로운 삶의 힘 솟아올라 맑은 복이 있으라
포덕 105년 3월 21일 조각 윤효중 글 박종홍 글씨 손재형
천도교대신사 순도 백주년기념 동상건립위원회 세움 포덕 105년 3월 21일 (서기 1964년) 대구달성공원, 순도 100주년 동상건립위원회
가이즈까 향나무 1907년 순종이 방문하여 이등박문과 함께 심었다.
느릅나무
관풍루觀風樓 선조 34년(1601년) 대구에 세워진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선화당의 정 남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어 관풍루라 했다 1906년 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어낼 때 옮겨졌으나 건물이 노후하여 1970년 해체하였다가 1973년 복원하였다.
또한 누각 주위에 큰 북, 종, 피리, 나팔 등의 기구를 갖추어 놓고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풍악소리에 맞추어 동, 서, 남, 북 4개의 성문을 여닫는 의식 절차가 엄숙히 행하여져 폐문루閉門樓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다.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화강석 외벌대 기단을 조성한 후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2층 중앙은 우물천장, 그외는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2층은 우물마루 통칸으로 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내밀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아래층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윗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두어 장식하였다.
관풍루觀風樓 죽농 서동균竹儂 徐東均의 글씨 관풍은 감사가 누 위에서 세속을 살핀다(관풍세속觀風世俗)는 뜻이다.
누하주
우물천장. 연등천장
나무계단
겹처마. 계자난간鷄子欄干
잡상雜像
토성 둘레길
구름에 가린 팔공산 비로봉.동봉.서봉
북구 방향
청룡산.두류타워
강산이 한바퀴 돌아 찾은 달성 주마간산식으로 둘러 보았다.
2018.09.16 |
'대구광역시 > 대구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구...경북대박물관.성주 법수사지 석조비로자나삼존불 (0) | 2019.01.04 |
---|---|
대구...대구공업대 삼층석탑 (0) | 2018.11.21 |
대구...순종황제 남순행로 (0) | 2018.09.16 |
대구...욱수동 석조지장보살입상 (0) | 2018.09.01 |
대구...수릉봉산계 표석 (0) | 2017.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