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순종황제 남순행로

임병기(선과) 2018. 9. 1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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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남순행로

대구 달성 앞 도로에 위치

 

대구에 살면서도

순종황제 남순행로 거리 조성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사실은 인지하였지만,

2007년 다음 카페 "나무를 찾아서. 나를 찾아서" 대구골목길 및 달성공원 나무 답사 이후 처음 들렸다.

 

 

 

조성배경 입간판

(이미 논란의 대상을 예상한 듯...)

 

"순종황제남순행로 조성사업은 2012년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추진하였으며

순종황제 상징 조형물조성을 포함하여 도로포장,가로등개체,간판정비등 지역민의 삶의 공간이 개선되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낙후된 골목 뒤안길에 숨겨진 침탈의 역시와 구구항일 스토리를 찾아내고 드러냄으로써 반성과 역사재인식 등 미래지향적인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순종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통치권을 통감부에 빼앗기고,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즉위 후 일본의 강요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차관이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어 일제는 재정부족의 이유를 들어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법권 등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를 앞세워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1926년 죽었다.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출처/Daum백과

 

 

대구역 봉영문을 나서는 순종 황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대구묘의 수행원이 동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월 5일 陽曆 2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7일부터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한다는 사실을 명령하고 수원을 임명하다

 

이달 7일에 대구(大邱), 부산(釜山), 마산(馬山)을 순행(巡幸)하겠다고 명하였다. 이어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병석(閔丙奭), 시종원 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 승녕부 총관(承寧府總管) 조민희(趙民熙), 장례원 경(掌禮院卿) 성기운(成岐運), 규장각 경(奎章閣卿) 조동희(趙同熙), 내장원 경(內藏院卿) 최석민(崔錫敏),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이회구(李會九), 전선사장(典膳司長) 김각현(金珏鉉),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 이명구(李明九), 장례원 예식관(掌禮院禮式官) 고희성(高羲誠), 승녕부 시종 이항구(李恒九), 궁내부 서기관(宮內府書記官) 이노우에 마사지〔井上雅二〕, 궁내부 대신 비서관(宮內府大臣祕書官) 김동완(金東完), 궁내부 서기관 다다 칸〔多田桓〕, 궁내부 사무관(事務官) 아오야마 센지로〔靑山淺治郞〕, 무라카미 유키치〔村上龍吉〕, 시종원 시종 이교영(李喬永), 이규원(李圭元), 조중국(趙重國), 김황진(金璜鎭), 장례원 예식관 류찬(劉燦), 현백운(玄百運), 이필균(李弼均), 박서양(朴敍陽), 장례원 장전관(掌典官) 김세익(金世益), 승녕부 시종 이용한(李龍漢), 승녕부 전의(承寧府典醫) 홍철보(洪哲普), 시종원 제약사(侍從院製藥師) 서정호(徐廷鎬), 규장각 전제관(奎章閣典製官) 윤희구(尹喜求), 내장원 이사(內藏院理事) 니나가와 아라타〔蜷川新〕, 주전원 이사(主殿院理事) 서상선(徐相璿), 궁내부 대신 관방 사무 촉탁(宮內府大臣官房事務囑託) 사에키 다쓰〔佐伯達〕, 시종원 시종보(侍從院侍從補) 이우진(李宇振), 김병목(金炳穆), 시종 무관(侍從武官) 어담(魚潭), 정희봉(鄭熙鳳), 홍완식(洪完植),

 

장례원 악사장(掌隷院樂師長) 백우용(白禹鏞), 전 대제학(前大提學) 김학진(金鶴鎭), 장례원 예식관 이인용(李仁用),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한창수(韓昌洙), 내각 법제 국장(內閣法制局長) 유성준(兪星濬), 내각 서기관(內閣書記官) 홍운표(洪運杓), 김명수(金明秀), 고원식(高源植), 내각 총리대신 비서관 사무 촉탁(內閣總理大臣祕書官事務囑託) 우에무라 마사키〔上村正己〕, 내부 대신(內部大臣) 송병준(宋秉畯), 내부 경무 국장(內部警務局長) 마쓰이 시게루〔松井茂〕, 내부 지방 국장(內部地方局長) 사와다 우시마로〔澤田牛磨〕, 내부 토목 국장(內部土木局長) 류맹(劉猛), 내부 서기관(內部書記官) 홍인표(洪仁杓), 내부 서기관 겸 경시(內部書記官兼警視) 이와이 게이타로〔巖井敬太郞〕, 내부 서기관 겸 비서관(內部書記官兼祕書官) 다치바나 사이스께〔立花犀介〕, 내부 비서관 백상규(白象圭), 경시 부감(警視副監) 구연수(具然壽),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임선준(任善準), 탁지부 사세 국장(度支部司稅局長) 스스키 기요시〔鈴木穆〕, 탁지부 서기관(度支部書記官) 히사요시 나오스케〔久芳直介〕, 탁지부 비서관(度支部祕書官) 박용구(朴容九),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병무(李秉武), 노부 장교 보병 부령(鹵簿將校步兵副領) 왕유식(王楡植), 보병 정위(步兵正尉) 조중완(趙重完), 포병 정위 김교선(金敎先), 보병 정위 송우영(宋禹榮), 오진영(吳璡泳), 의장기병 기병부위(儀仗騎兵騎兵副尉) 정운홍(鄭雲鴻), 이종성(李鍾聲), 군부 부관 공병 참령(軍部副官工兵參領) 김기원(金基元), 법부 대신(法部大臣) 고영희(高永喜), 법부 비서관(法部祕書官) 박기준(朴基駿),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재곤(李載崐), 학부(學部) 비서관 이만규(李晩奎), 한성 고등학교 교수(漢城高等學校敎授) 여규형(呂圭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 비서관(農商工部祕書官) 장두현(張斗鉉), 농상공부 농무 국장(農商工部農務局長) 대판(代辦)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농상공부 상공 국장 대판 쓰루오카 에이타로〔鶴岡永太郞〕, 농상공부 산림 국장(農商工部山林局長) 최상돈(崔相敦),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윤식(金允植),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권중현(權重顯)에게 남쪽 순행할 때 호종(扈從)하라고 명하였다.

 

 

선화당에서 순종황제를 맞는 시민들

 

 

 

아래 내용은 2007년 답사기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이정웅 선생님의 글을 발췌하였다.

 

나는 순종 황제가 대구에 온 내용이 실린 책 <대구이야기, 전 중구문화원 사무국장 손필헌님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4년 대구에 정착한 일본 거류민의 한 사람인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1930년까지 26년 간 대구에 살면서 당시 상황과 체험담을 기록한 대구물어(大邱物語)를 번역한 책>을 보면서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존(至尊)인 황제의 순행(巡幸) 모습을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 상인이 쓴 책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0분 착의 궁정열차로 대구에 도착하셨다. 하늘에 영광이요, 땅에는 축복이라 한`일 수많은 민중이 천지를 흔드는 환호 속에서 임금님이 탄 수레를 맞이하였다. 폐하의 차가 출발하자 군악대가 국가를 취주(吹奏) 하는데 그 장엄한 기운이 사방을 제압하고 맞이하는 관리나 시민 모두가 최고의 경례를 드리는 가운데 폐하는 덮개가 없는 수레에서 가볍게 인사하시며 숙소에 들지 않으시고 의병장을 앞세워 행렬도 엄숙한 도열 속으로 지나셨다. -중략-

 

폐하께서는 남한 순행의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시고 이튿날 8일 오전 9시 10분 부산으로 출발하시는데 부산, 마산의 순찰을 마치시는 12일에는 대구에 다시 오셔서 하루를 묵게 되시니 대구로서는 이중의 광영(光榮)이었다.”


“황제 폐하의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등박문과 함께 마산으로부터 봉련(鳳輦=꼭대기에 금동(金銅)의 봉황을 달아 놓은 임금님이 타는 가마)이 다시 대구에 안착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앞서보다 더 장엄하고 시내의 장식도 지난번보다 더 한층 화려했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등박문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이상이 순종황제가 대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부산, 마산을 거쳐 대구로 다시 되돌아 온 장면에 관한 <대구물어>의 일부 기록이다.

 

순행 뒷이야기를 보면 황제가 가는 길(현 북성로)을 갑자기 넓히고 그 것도 모자라 보기 험한 곳은 천으로 둘러쳐 당시 대구의 옥양목(玉洋木)이 동 났다고 한다.

순종황제의 대구방문은 대구시민들의 사기를 높였고, 도로축조 등으로 개발이 앞당겼던 것은 사실이나 왜 다른 곳을 놔두고 대구를 선택하였느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으나 아마 두 해전인 1907년에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 이상 방치한다면 대구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이 황제를 앞세워 민심을 무마하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제지보

간선도로에서 달성공원으로 향하는 남순행로 초입

 

국새를 왜 입구에 조성했을까?

 

 

 

 

 

 

철로 조형물

순종이 대구역에 도착한 일자를 새긴 듯 하다.

 

1909. 0107.1525

 

 

 

동상 앞쪽 의자

순종황제가 앉았던 어가 속의 용상 조형물인듯.

 

 

태극

 

 

이화

대한제국의 국화를 상징한 것 같다.

 

 

순종 동상

 

 

 

순종동상 비문

 

이렇게라도...

 

 

 

 

순종과 이등박문이 기념식수한 가이즈까향나무.

달성공원에 위치

 

아래 내용은 2007년 나무답사에서 이정웅 선생님이 설명하셨으며, 선생님의 글에서 발췌하였다.


“황제 폐하의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등박문과 함께 마산으로부터 봉련(鳳輦=꼭대기에 금동(金銅)의 봉황을 달아 놓은 임금님이 타는 가마)이 다시 대구에 안착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앞서보다 더 장엄하고 시내의 장식도 지난번보다 더 한층 화려했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등박문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나무를 심을 때 이등박문은 66세였고 순종은 33세였으니 만약 나이에 맞춰 심었다면 더 굵은 것이 이등박문, 작은 것이 순종황제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달성공원에 기념식수를 했던 이등박문은 그해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射殺)되고, 순종 황제 역시 이듬해 8월 일본의 병합으로 자리를 잃고 500여 년을 지켜온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만다.

시민의 휴식처로 변한 공원에 떡 버티고 있어 역사의 부스럼 같은 존재이기는 하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직접 심은 나무인 만큼 두고 보았으면 한다.

 

 

허리통증의 차도가 있는 듯하여

산행을 대신하여, 대구 달성을 한바퀴 돌았다.

 

순종황제 남순행로

더 이상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니.

 

201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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