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정릉 봉국사

임병기(선과) 2018. 12. 2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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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임에도 봉국사의 석조여래좌상과 명부전을 뵙기위해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무소 보살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자유롭게 참배하라는 말씀을 덧 붙힌다.

 

 

봉국사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의 원찰(願刹)로 정릉길 옆에 위치한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고려말 공민왕 3(1354)에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고, 조선초 태조 4(1395)에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당시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에 의해 창건된 호국 사찰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사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 현종 10(1669)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을 수봉(修封)하고 태묘에 제사를 드리게 되면서 정릉의 사초(沙草)를 새로 하는 동시에 정자각, 안향청, 전례청 등을 새로 세우면서 이 절을 원찰로 하였으며, 이 때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국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절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으며, 조선말 임오군란(1882) 때 봉국사가 소실된 것을 한계(漢溪)덕운(德雲) 두 스님이 힘을 모아 이듬해에 중건하였다.  그 후 1898년에 명부전을, 1913년에는 칠성각을 중건하였다. 197910월에는 절 입구에 일음루(一音樓)를 건립하였고, 1994년에는 안심당을 지어 스님들의 수행정진과 신도들의 신행처로 사용하고 있다(다음에서 발췌정리) 

 

 

만월보전

주불전으로 석조 약사여래를 본존불로 목조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를 협시로 모신 특이한 불단이다.

좌협시불은 아미타불이 옳은 존명으로 생각된다.

 

사전 준비부족으로 다녀온 후 목조여래좌상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았다.

 

 


 

석조약사여래좌상

호분을 입힌 흔적이 보이는 남아 있으며, 조선후기에 봉안된 불상으로 전한다.

불신에 비하여 불두가 큰 편이며, 소발, 중간 계주, 정상 계주를 표현하였다.

둥글고, 후덕한 상호에 작은 입이 인상적이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법의는 이중착의법이며 군의 자락을 수평으로 마감하였다.

두 손을 포개어 약함을 들고 있다.


문헌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봉은본말사지에 만월전에 봉안된 석질분상石質紛相의 약사여래로 높이는 3.30寸, 너비는 2.30寸초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1940년에 작성된 조선사찰귀중재산목록에도 봉국사에 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한다. 따라서 봉국사 석조불좌상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봉국사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약사여래 우측 목조석가여래좌상

다라니, 시주목록이 복장유물에서 발견되었으나 조성시기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18세기 불상으로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수도권의 석조약사여래좌상의 작례



시흥 호압사



남양주 흥국사



시흥 진덕사


 

명부전.독성각.광응전(칠성각,산신각)

날이 어둑어둑하여 극락전만 참배하였다.

 


독성각

 

 

명부전

세로로 새겨진 현판이 이채롭다.

 


석조지장보살

석조지장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벽면을 따라 시왕상과 판관상,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30여 구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30구의 상은 대부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상들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지장보살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고 무릎 높이가 낮아 비례상 불균형한 감은 있으나 미소를 머금은 동안의 얼굴과 유려한 옷주름, 균형 잡힌 좌세 등에서 안정감 있는 불신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는 소발로 둥근 편이며, 타원형에 가까운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과 원통형의 코, 미소를 머금은 입 등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되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박혀있다. 목은 밭으면서 두꺼운 편으로 아래에는 가늘게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두 어깨에 걸쳐 통견으로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에 다시 옷자락을 살짝 걸쳤으며 오른쪽에서 완만한 원호를 그으며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왼쪽 법의 안으로 끼워놓았다. 이러한 착의법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넓게 트인 가슴에는 군의를 걸치고 있으며, 군의 위쪽은 꽃모양으로 처리하였다. 목은 밭으면서 두꺼운 편으로 아래에는 가늘게 삼도가 표현되었다.

결가부좌한 두 무릎 폭은 다소 좁은 편이고 무릎 높이도 높지 않아 건장하기 보다는 단아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펴서 무릎을 살며시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둥근 형태의 보주를 쥐었 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각각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그리고 시왕 및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시왕도

19세기에 조성된 후불탱화로 추정된다..

중앙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한 지장삼존을 중심으로 하단에 선악동자가 자리하며, 좌우측 주위로는 각각 5대왕씩 10대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옥졸, 천동․천녀, 마두․호두신 등의 권속들을 배치하였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시왕도

봉국사 명부전의 시왕상 뒤에 봉안된 불화로서, 1898년에 한봉창엽을 비롯하여 명응환감, 계은봉법, 월선봉종, 금곡영환, 예운상규, 영욱, 민호, 용담규상, 선하선명, 두연, 추산천성, 덕월응륜, 한곡돈법, 금운정기, 운조 등 다수의 화승들이 함께 조성하였다.

그림은 총5폭으로, 전각의 향우측에 1대왕⋅3대왕도, 5대왕⋅7대왕⋅9대왕도, 향좌측에 2대왕⋅4대왕도, 6대왕⋅8대왕⋅10대왕도 및 건영대장군.일직사자.월직사자가 걸려있는데, 향좌측 끝에도 원래 사자 및 장군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결실되었다. 각 폭의 화면 구성은 상단에는 명부의 각 대왕이 심판하는 장면 하단에는 각 대왕의 심판에 따라 행해지는 지옥장면이 그려져 있다.

봉국사 시왕도는 19세기 말 서울 경기지역에서 성행했던 대표적인 시왕도 형식으로, 보광사 시왕도(1872년), 화계사 시왕도(1878년), 흥천사 시왕도(1885년), 봉원사 시왕도(19세기 말) 등과 동일한 도상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같은 형식의 다른 불화들과 달리 시왕도 및 사자도를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문화재청에서 발췌)

 

 


동자상.호랑이


 


동자상.벼루

 


동자상.벼루

 


동자상.정병

 


동자상.사자

 


동자상.?

 


일직사자.월직사자(1898년)

 


건영대장군(1898)

 


인왕상

 

 

흥천사는 다음으로 미루어야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 최초 동선은 모두 순례하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참배를 허락해주신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불순한 일기에도 함께한 우리카페 최석훈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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