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정릉 경국사

임병기(선과) 2018. 12. 2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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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사 慶國寺

정릉의 원찰로, "삼각산의 정기를 받아 정릉천이 흘러내리는 맑은 골에 자리잡은 경국사는 고려말에 창건된 고찰이다.조선 헌종 때부터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의 정릉에 법식대로 제사를 올리게 되면서 인근에 있던 경국사도 청암사로 사명을 바꾸어 정릉의 원찰이 되었다"고 경국사 홈페이지에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25년(충숙왕 12) 율사 정자(淨慈)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고, 1330년경 무기(無寄)가 머물면서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31년 거사 채홍철(蔡洪哲)이 선방을 증축하여 선승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1352년(공민왕 1)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주석(住錫)한 뒤부터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서 전승되었다.

 

1507년(중종 2) 억불정책으로 법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퇴락된 채 빈 절로 남아 있다가,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 1546년(명종 1)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왕실의 시주로 건물을 전면 중수하고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그 때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라 개칭하였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승성(昇誠)이 건물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신축하였으며, 1737년의눌(義訥)이 주지에 취임하였고, 1793년태흘(泰屹)이 크게 중수하였다.1842년(헌종 8) 한국불교 계맥(戒脈)의 중흥조인 낭오(朗旿)가 관음전을 신축하였다. 1864년(고종1) 왕의 등위축재(登位祝齋: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기도)를 열었고, 1868년 호국대법회 개설과 함께 삼성보전과 산신각을 신축하였으며, 왕실에서는 종을 희사하기도 하였다.1878년치능(致能)이 예조의 도움으로 각 요사를 중수하고 김대비(金大妃)의 사십구재를 지냈으며, 1915년에는 석찰(錫察)이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1932년이원우(李元雨)의 시주로 반야교(般若橋)를 중수하였고, 1921년에는 단청과 탱화의 대가인 보경(寶鏡)이 주지에 취임한 뒤, 1979년까지 퇴락된 건물을 중수하여 한국불교의 모범 사찰로 변모시켰다."

 

이후 1979년 지관 스님이 주석하시면서 가람을 일신시켰으며 스님은 2012년 경국사에서 입적하였다.

 

 

일주문

등명락가사 일주문 느낌이다.

 

 

부도전

 

 

자운대율사 계주원명 사리탑慈雲大律師戒珠圓明舍利塔

스님의 사리 3과와 유골 등이 안치되었으며, 근대 한국불교 율맥(律脈)을 이어가고 있는 자운 대율사의 전계제자들의 면면을 새겨넣은 것이 특징이다.

 

자운당 성우대율사(慈雲堂 盛祐大律師, 1911~1992).불교신문에서 발췌

현대 한국불교 계율의 중흥조다. 율풍 진작과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자운스님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내가 열반한 후에는 계율을 스승삼아 수행하라”고 한 가르침대로 올곧게 수행하는 삶을 살았다. 불자들에게 계율의 엄정함을 일깨우기 위해 율장을 번역 해설해 널리 알리고 스스로의 삶도 이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 후학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갖게 했다. 

 

스님은 또한 종단의 발전을 늘 염려했으며 화합승가를 강조했다. 출가수행자와 재가불자들이 항상 화합해 모두가 주어진 몫을 다할 때 종단의 발전,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음을 간곡히 일러주었다. 스님은 1958년부터 계정일치(戒淨一致) 수행을 제창하고 정토경론과 문수신앙을 널리 유통했다. 

 

미타염불, 아미타경 독송, 미타예찬, 문수예찬을 일과로 해 매일 수행했으며 매월 8일에 방생, 아침공양은 죽으로 하고, 오후불식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했다. 스님은 또한 천도(薦度)의 수법(修法)과 아울러 지장청(地藏請)과 지장공양문을 엮는 등 여러 가지 방편으로 대중을 애호(愛護)했다. 그런가하면 스님이 일러주고 몸소 실천한 참법(懺法)수행은 오늘에도 실행되고 있다. <자비도량참법>을 간행, 유통한 스님의 뜻에 따라 해인사 홍제암, 부산 감로사, 석남사, 서울 진관사, 수원 봉녕사, 문경 윤필암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여법히 수행하고 있다.

 

자운스님은 남방불교와의 인연도 깊다. 일찍이 대만 태국 미얀마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남방불교성지를 순례, 현지 고승들과 유대를 돈독히 했다. 한국불교계에 비구·비구니의 수계법인 이부승수계제(二部僧授戒制)를 여법히 하고 남방불교계에 비구니교단을 복원시키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자운스님은 율장연구와 홍포에 전념하기 전에 출가수행자로서 갖춰야 할 참선 수행에도 열정을 다해 당신의 선지(禪旨)를 드러내 용성스님으로부터 전법게와 의발을 전해 받았다. 

 

스님이 평생 펼친 일은 후학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다. 그러나 그 모두를 요약하면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의 수행에 한 치의 게으름이 없었으며 어떻게든 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수행하도록 하는데 일생을 다 바친 어른이다. 

 

자운스님은 1911년 음력 3월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부친 김자옥, 모친 안동장씨의 5남으로 탄생했다. 7세부터 출생지인 진부서당에서 동몽선습을 시작으로 사서삼경 등을 수학했다. 15세 때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혜운 경윤(慧雲 敬允)스님을 만나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들었다.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이 불급승가반일한(不及僧家半日閒)이라(인간의 백년살이 삼만육천날이란 것이 풍진을 떠난 명산대찰의 한나절에도 못 미치는 것을).” 이때부터 점점 세속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1927년 1월 상원사로 혜운스님을 찾아가니 스님은 해인사로 떠나고 없었다. 그 길로 부모의 허락도 없이 해인사로 달려갔다. 출가를 결심하고 팔만대장경 장경판전에서 1만배를 올렸다. 그해 2월8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혜운스님을 은사로, 남전 광언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32년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34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권일봉 율사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자운스님의 계맥은 일봉 경념(一鳳 敬念, 1863~1936년)율사로부터 이어진다. 이후 자운스님은 일우 종수, 동곡 일타, 가산 지관, 무봉 성우, 석엽 철우스님과 비구니 보월 정행, 원허 인홍, 법계 명성, 세주 묘엄스님에게 전계(傳戒)했다. 

 

자운스님은 1934년 7월 보름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를 성취한 후 35년부터 울진 불영사에서 장좌불와로 6년 결사를 원만히 회향했다.

1938년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로 용성스님을 찾아 거량한 후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하고 백운영부동(白雲永不動)이로다. 인답수저과(人踏水底過)한데 수불착의상(水不着衣裳)이라(푸른 산은 늘상 움직이는데/ 흰 구름은 영 요지부동이네. 사람이 물속을 거닐어 봐도/ 옷이 물에 젖어들지 않네).” 용성스님은 이를 듣고 그 경지를 인증(認證)하여 곧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허락하고 전법게와 의발을 전해 주었다. 

 

1939년 4월 보름부터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하루 20시간씩 백일문수기도를 봉행했다. 조국의 광복과 불교중흥의 대원을 세우고 기도를 봉행하던 중 99일 되던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계척(戒尺)을 전해주면서 견지금계(堅持禁戒)하면 불법재흥(佛法再興)하리라는 감응을 받았다.

 

그로부터 자운스님은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율장 연구에 돌입했다. 당시엔 율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스님은 2년여에 걸쳐 한여름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위의(威儀)를 갖춰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 卍속장경에 실려 있는 오부율장과 그 주(註)와 소(疏)를 모두 필사, 이를 깊이 연구해 율장에 정통하게 됐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가졌다. 자운스님은 1947년 봉암사결사를 성철스님과 함께 했다. 그로부터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립하고 율문을 강의하는 한편 한문으로 된 사미율의, 사미니율의, 범망경,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과 이 책들의 한글, 번역본을 널리 유통시켰다. 종단의 전국 단일계단에 이르는 1991년까지 스님이 전계한 수계제자가 무려 10만여 명에 이른다. 

 

말년에는 염불왕생을 발원하고 무량수경, 정토삼부경, 십육관경, 아미타경, 권발보리심문, 정토법요, 원오선사법어 등을 운허스님 번역으로 10만여 부를 간행, 유통했다. 

 

1955년 불교교단 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 1956년 해인학원 이사장, 같은 해 해인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 1957년 대한불교조계종 경남종무원장, 1958년 조계종 중앙감찰원장, 1959년 밀양 표충사 주지, 1960년 해인사 주지 재임, 같은 해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승가연합 창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67년 동래 범어사 주지, 1970년 해인사 주지 3임(任), 1974년 인도에서 열린 세계평화촉진회 한국대표로 참가, 1975년 조계종 규정원장, 1976년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에 추대됐다. 1977년 대각회 이사장, 1978년 대종사 법계 품수, 1979년부터 입적 때까지 동국역경원장을 역임했으며, 1991년 3월 종단의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을 사임했다. 1992년 2월7일(음력 정월초나흘) 밤10시 입적했다. 

 

진성원명본자공(眞性圓明本自空) 

광조시방극청정(光照十方極淸淨) 

래여청풍소요래(來餘淸風逍遙來) 

거수명월자재거(去隨明月自在去)

“진성은 원명하여 본래부터 공적함이여. 그 광명 청정하여 온 누리를 밝게 비추네. 이 세상 올 적에는 청풍따라 소요히 왔고, 마지막 떠날 때는 명월따라 자재히 가네.” 자운스님의 임종게다. 세수 82세, 법랍 66년. 

스님의 장례는 입적 7일째인 2월13일 조계종 원로장으로 해인사 연화대에서 다비했다. 은행만한 사리 19과, 녹두만한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작은 것은 거두지 아니하고 큰 것 19과만 수습하여 해인사 일주문 앞에 행적비와 사리탑을 세웠다

 

 

 

 

 

 

2005년. 지관스님이 부도를 봉안하였다.

 

 

자운대선사 부도비

 

 

보경당보현대종사 부도寶鏡堂 普賢大宗師

"보경당 보현대종사(寶鏡堂 普賢大宗師 1890~1979) 스님의 휘는 보현(普賢), 법호는 보경(寶鏡)이며, 속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慶州)입니다. 아버지의 휘는 치준(致俊)이며 어머니는 이씨부인입니다.1890(고종 27) 8월 15일 서울 중구 입정동 10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13세인 1902년(광무6) 12월 20일 경국사에서 이춘용(李春聳) 스님을 은사로 엄기송(嚴其松) 스님을 계사로 득도하였습니다.

 

1913년 4월 19일 경기도 장단군 보봉산(寶峰山) 화장사(華藏寺)에서 향엄지순(香嚴之淳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습니다. 1916년 4월 범어사에서 사교과(四敎科), 1920년 3월 전등사에서 대교과(大敎科)를 마쳤습니다.  이어 참선 수행을 시작하여 1921년 7월 15일 범어사 선원에서 첫 안거를 성만한 이래 25하(夏)를 성취했습니다. 1945년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종사법계(宗師法階)를 받았으니 교맥(敎脈)으로는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제19세(世)인 경제지영(鏡濟智永) 강백의 제자이고, 선맥(禪脈)으로는 역시 태고보우의 제19세인 자운상준(慈雲尙俊)선사의 법제(法弟)입니다.

 

1922년 2월 9일자로 삼각사 경국사 주지로 취임하여 1979년까지 약 60년 동안 경국사 절에서 떠나지 않았던 스님은 경국사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 속에서 민족의 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민족문 화의 전승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 불상 조각과 불화화법을 익혀 대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불교의 전통미술을 보존 선양하는데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스님은 근대 불모(佛母)로서 불상과 탱화는 물론 단청 부문에 대해서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문화생 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주요작품으로는 경국사를 비롯하여 전등사와 낙산사, 삼막사, 상원사, 삼각산 문수사 등지에 봉안된 탱화와 벽화, 불보살상이 있습니다. 또한 보신각과 경회루, 남대문, 탑골공원의 단청 등에도 스님의 손길이 거쳐갔습니다.

 

워낙 성품이 강직하고 지계에 철저하여 짧은 치마를 입은 처자는 경내에 들어서지도 못하 게 하고 조용한 사찰을 요란하게 하는 뾰족구두를 신고 들어오면 구두굽을 잘라 내버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절에 들렸다가 보경 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이후 몇 차례나 더 오고 갔으며, 1953년 11월에는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자,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이곳 경국사에 있다고 여겼는지 그를 절에 안내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일 닉슨은 자기 회고록에서 경국사에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방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고 합니다.

1954년 이승만대통령은 스님을 한국의 유일한 인간문화재이며, 모범적 승가상(僧伽像)이 라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승려들의 취처(娶妻)를 비롯하여 일본 불교의 잔재를 불식(拂拭 하도록 하는 내용을 지닌, 대비지문교제4호(大秘指文敎第四號)의 특별유시를 반포하였습 니다.  이는 불교정화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79년 5월 7일(음 4.12) 세수 90, 법랍 78세를 일기로 경국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출처/다음카페.향기로운 불교.백우님 글

 

 

보경당보현대종사행적비寶鏡堂 普賢大宗師行蹟碑

 

 

목조아미타삼존,목각탱

경국사 답사 목적이 목각탱을 찾아 보는 것이 었다.

우리나라에는 상주 남장사. 문경 대승사. 실상사 약수암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각탱이 있으며, 약수암 목각탱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문화재청)

 

"경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조선시대의 목각탱으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모두 13구의 불상과 보살이 있다.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커다란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 위에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 있으며, 넓적한 얼굴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하고,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두꺼워서 신체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아래위의 너비가 같은 조선시대 특유의 형식이다. 불꽃무늬가 위로 솟아서 뻗쳐있고 그 안에 작은 부처들이 표현되어 있다. 본존 좌우에 아미타 8대보살이 있고, 그 밑 좌우에 사천왕 중 증장천과 지국천이 있다. 8대보살은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으며, 두꺼운 옷을 입고 연꽃을 든 채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다. 본존과 같은 높이에 보살이 서 있고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이 1구씩 서 있다."...문화재청

 

 

실상사 약수암

 

 

상주 남장사

 

 

문경 대승사

 

 

 

 

수미단

 

 

팔상도

 

 

팔상도

 

 

화기

광서 13년 정해 3월(光緖 13년.丁亥 3월).1887년

 

화사 긍법(亘法), 종현(宗現)

 

대시주

상궁 법성화.법상화 두 분이다.

 

 

신중도(사본?)

1887년에 혜산 축연과 허곡 긍순이 함께 조성한 신중도로서 상궁들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명부전 현판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로 보였다.

 

미쳐 답사하지 못했지만

경국사에는 해강 김규진.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도 있다.

 

 

지장보살 삼존과 지장탱.

하지만, 명부전 지장탱은 지정문화재와 다른 그림이다.

 

 

지장시왕도. 시왕

 

 

지장시왕도. 시왕

 

 

철조대세지보살좌상

간송의 최완수님은 “북방 민족의 활기가 넘치는 요금(遼金)시대의 조상(彫像), 그 중에서도 요대(遼代)의 보살상이 틀림없다”고 하셨다고 하지만, 언감생심 안목이 없는 중생은 눈에 담고만 왔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불상은 1703년(강희 42년)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서 조성되어 도갑사 견성암에 봉안되었던 관세음보살좌상으로, 현재는 서울 경국사 법당 향우측 벽에 봉안되어 있다. 전체높이가 60cm에 달하는 중형의 보살상으로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발원기에 의하면 색난(色難)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추☐(秋☐), 대유(大裕), ☐척(☐陟)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頭部)가 큰 편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장식 등이 잘 남아있다. 정상부에는 높고 길죽한 보계가 표현되었으며 이마부분에는 빗으로 빗은 듯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표현되었고, 보발은 귀의 중간부분을 감싸고 흘러내리다가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팔뚝 위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지만 턱 부분에 살이 올라 부드러워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선명하며, 활형[弓弧]의 가는 눈썹과 약간 위로 치켜뜬 긴 눈, 오똑한 콧날, 꾹 다문 얇은 입술 등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신체는 안정감있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편으로, 어깨 폭이 넓지 않아 아담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며 결가부좌한 무릎 폭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준다. 양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는데, 법의는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으며 왼쪽의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에서부터 무릎부분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으며, 오른쪽 법의는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 수평 또는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려 첫째와 셋째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에 대어 길죽한 정병을 잡고 있다. 한편 좌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 발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보관은 장식과 관대 등이 잘 남아있다. 영락장식과 화염보주 등으로 화려하면서도 치밀하게 장식된 보관에는 아미타화불은 표현되지 않았다. 특히 귀 옆으로 율동감있게 뻗어 내린 관대자락은 강렬하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 보살상은 조선후기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장인 색난(色難)이 1703년에 조성한 보살좌상으로, 신체에 비하여 다소 큰 듯한 얼굴이라든가 안정감있는 좌세, 오똑한 코, 수평으로 가로지른 군의의 표현,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 등이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17세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

 

 

 

 

감로도

화승인 축연과 철유가 제작한 작품이자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불화로서 당시 왕실에서의 불화발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촬영과 자유롭게 뵙고 가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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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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