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영남루 현판

임병기(선과) 2018. 9. 28.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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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밀양 객사이기도 하다.

2층 누마루 정청을 비롯 좌익실. 1층 우익실은 정청과 계단(月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속에 걸린 현판...


 

 

 

 

 

 

 

북쪽 처마 아래 중앙에 걸린 3개 현판 중앙


영남루'(嶺南樓)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작품. 무신년(戊申年. 1788년)


조윤형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2군·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 등을 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원하고 자연스러운 행서체인 ‘영남루’ 글씨는 당대 명필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1725~99)이 썼다. ‘무신(戊申) 월(月) 일(日)서(書)’라는 낙관 글씨와 ‘조윤형인(曺允亨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무신은 조윤형의 생몰년대로 보아 1788년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건물을 중건하기 전의 누각에 걸려있던 편액인 것으로 추정된다. 64세의 나이에 쓴, 무르익은 필치를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남루는 신라 때 창건된 영남사(嶺南寺)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1365년 남아있던 사찰의 작은 누각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영남루라 명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0년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했으며, 선조 때 소실되자 1637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지금 누각은 1844년 다시 세운 것이다.

송하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체의 글씨에 능했다. 특히 획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초서·예서를 잘 썼다. 원교의 스승인 백하(白下) 윤순(1680~1741)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766년 글씨로 벼슬길에 올랐다. 원교를 이어받아 진경시대 글씨를 빛낸 대가인 그는 정조가 가장 총애했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림에 정선과 김홍도가 있다면, 글씨에는 조윤형이 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이처럼 글씨로 벼슬을 할 정도로 당대 명필로 이름이 났던 송하는 당시 관청의 금석과 편액 글씨를 도맡아 썼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矗石樓)’ 편액, 수원 화성행궁의 ‘신풍루(新豊樓)’ ‘봉수당(奉壽堂)’ ‘낙남헌(洛南軒)’, 영주 풍기의 ‘금선정(錦仙亭)’, 공주 마곡사의 ‘심검당(尋劒堂)’, 김천 직지사의 ‘황악산직지사(黃嶽山直指寺)’ 편액 등이 남아있다. 시원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글씨들이다.

직지사 일주문에 걸린 해서 편액 ‘황악산직지사(黃嶽山直指寺)’에는 ‘경인하절(庚寅夏節)’이라는 글씨와 ‘조윤형인(曺允亨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가 45세 때인 1770년에 쓴 것이다."...영남일보/김봉규


반대편에는 성파 하동주가星坡  河東洲(1869-1943)가 62세에  쓴  영남루 현판이 있다.


 

강좌웅부(江左雄府)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작품

강좌웅부는 낙동강 왼쪽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교남명루(嶠南名樓).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작품.

교남명루는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이란 뜻이며, 교남지방이란 영남지방을 칭한다.


이유원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이유원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층 누마루에 걸린 현판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계묘년(癸卯, 1843년) 여름

밀양부사 이인재(李寅在)의 맏아들 이증석 이 11살 때 작품이라고 한다.


 

영남루(嶺南第)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판을 쓴 이증석의 동생  이현석이 계묘년(癸卯, 1843년) 여름에 남긴 글로 그의 나이는 7살 이었다.


 

현창관(顯敞觀)

병인년(丙寅年.1866년) 5월

영남루에 오르니 높고 넓은 세상이 펼쳐진다는 의미이다.


 

강성여화(江城如畵)

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울려 마치 그림과 같다.


 

용금루(湧金樓)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


 

우익실(침류각)과 월랑


 

침류각(沈流閣)

정유추 배수환 丁酉秋  裵綉煥.단기 4290(1957)년 9월

 


 월랑月廊


 


정청

궐패를 복원하면, 관광객이 오를 수 없겠지?

 


좌익실(凌波閣)

 


능파각(凌波閣)

정유추 배수환  丁酉秋  裵수煥. 단기4290(1957)년 9월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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