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진주시

진주...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8. 12. 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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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학리사지 삼층석탑

 

11.27일

77년만의 귀환이라는 제목하에 많은 매체를 통하여 진주박물관에서 열린 점안식이 보도되었다.

 

77년?

그 긴 만행(卍行)의 숨은 사연은 연합뉴스에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펴낸 자료집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에 따르면 석탑은 수백 년 전에 폐사한 범학리 절터에 있었으나, 1910년 무렵 자연스럽게 넘어졌다.경북지사는 1941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보낸 문서에서 부재 일부는 땅속에 있고, 일부는 지면에 노출됐다고 설명하면서 "동네 주민들은 본래 석탑을 귀찮게 여겼고, 지주도 농사를 짓는 데 방해물 취급을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1940년 11월 무렵 진주에 거주하는 정정도(鄭貞道)라는 인물이 석탑 부재를 구매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반대했다.

정정도는 100엔을 마을회관 건설비로 기부하는 조건으로 석탑 반출 묵인을 요청했고, 결국 주민들은 마지못해 석탑을 넘기기로 했다.무게가 12t에 달하는 석탑을 절터에서 도로변으로 운반하는 데 동원된 인원은 500여 명. 이어 화물자동차 6대로 진주까지 부재를 나른 뒤 진주에서 대구까지는 철도로 운송했다.경북지사는 "석탑은 대구부내 오쿠(奧) 골동상에 매각됐다"며 "평가액은 약 1만 엔 정도이지만, 실제 매매 가격은 불분명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기부금 100엔의 용도를 조사하니 67엔 32전은 마을회관 수리비와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잔금은 구장(區長)이 보관 중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당시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석탑을 살핀 뒤 "탑이 해체된 채로 땅 위에 놓였다"면서도 "우수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신라시대 석탑"이라고 기술했다.


평가액 1%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시작된 떠돌이 생활은 77년간 이어졌다.

총독부 박물관은 석탑 존재를 확인하고는 고향인 산청으로 보내지 않고, 서울로 이송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5월에는 미군 공병대가 경복궁 안에 다시 세워 1962년 국보로 지정됐지만,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으로 해체됐다.

석탑 부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수장고에 들어갔고 2017년 진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범학리 사지

산청군 산청읍 범학리 범호사(泛虎寺)라고 전해오는 절터이다.

l456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기록을 통해 범액사지(泛額寺址)로 추정되기도 한다.

절에 대한 창건과 폐사 등의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경작지로 변한 터에는 조선후기까지 향화를 피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진주박물관

점안식 다음 날 동호회원들과 다녀왔다.

 

2층기단의 삼층석탑

상륜부가 망실되었고, 하층기단 중석은 후보 하였으나

왜 하대저석, 지대석은 복원하지 않았을까?

 

 

 

 

 

경복궁 전시(누들스님 편집)

 

 

지대석

후보하지 않았다.

 

하층기단 중석

높게 4매석을 엇물림으로 결구하였고, 우주,탱주를 표현하지 않았다.

상층기단 면석, 초층탑신의 장엄 장식으로 미루어 판단컨데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겠지만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겠다.

 

위 경복궁 시절 사진에는

저석과 중석이 일석이며 탱주 2주,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경복궁 사진의 하층기단은 1947년 복원시에 후보하였다)

 

하층기단 중석이 높은 작례는 범학리삼층석탑 보다 앞선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에서 먼저 보인다.

그러나, 법수사지에는 큰 안상을 새겨 싱거운(?) 느낌을 상쇄시켰다.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후보한 하층기단 중석과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운 산청지역에 현존하는 내원사, 대포리, 삼장사지, 단속사지 삼층석탑을 아래에 게시한다.

 

하층기단 갑석

4매 부재로 결구 하였으며. 약간의 물매가 있고, 상부에 각호 2단 굄을 조출하였다.

 

상층기단 중석

4매 부재를 감입식으로 결구하고, 각 면에는 중앙에 탱주를 모각하고 2구 신장상을 모셨다.

현장 안내문에는 신중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여러 자료에 팔부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팔부중의 존상을 구분하기 어려워, 시대 하강을 암시하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

2매석(많은 자료에는 3매석으로 기록)으로 결구하였으며 상부에 2단 각형 굄을 조출하였고, 하부에 부연이 있다.

 

초층탑신

통돌이며, 각면에 보살상을 연화좌에 모셨다.

두건을 쓴 상으로 추정되는 지장보살상만 정면상이며, 다른 상은 측면상이다.

 

탑신

전층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크게 급하지 않으며, 전각의 반전은 분명하다

상부에는 2단 각형 굄을 표현하였고, 층급받침은 전층 4단이며, 절수구를 두었다.

전각에는 좌우 2개 풍탁공이 있다.

 

상륜

망실된 상태이다.

복원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대부분 자료에 9세기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9세기 말로 생각된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

 

 

산청 대포리 삼층석탑

 

 

산청 삼장사지 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

 

 

상층기단 중석(남)

 

 

 

 

상층기단 중석(서)

 

 

 

 

상층기단 중석(북)

 

 

 

 

상층기단 중석(동)

 

 

 

 

초층 탑신 보살상

 

 

공양보살상(남)

교각좌이며, 지물은 불분명하고 측면상이다.

 

 

지장보살(동)

윤왕좌(?), 두건을 쓰고,정면상이다.

 

 

지장보살상

 

 

공양보살상(북)

교각좌(?)이며, 측면상이다.

 

 

공양보살상(서)

측면상이며. 좌슬착지이다.

 

 

 

전층 4단 옥개 받침

탑신의 양우주

 

 

절수구가 분명하다

 

 

풍탁공

 

 

옥개석 전각 반전

 

 

망실된 상륜부

 

 

 

 

 

 

 

범학리 삼층석탑

긴 만행을 끝내고 고향 땅 가까운 곳으로 귀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알고 있지만

뵙기가 요원한 몇몇 탑도

내생애에 인연 지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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