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보성군

보성...반석리 석불좌상.석탑부재

임병기(선과) 2018. 11. 2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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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장돌뱅이.유현과 다녀 온 글이다

(겁없이 썰을 풀어 낸 글이지만 지난날 내 모습이기에 가감없이 가져왔다)

 

하루도 뉘엿뉘엿 할 무렵 예향 보성으로 접어든다.
언제부터인지 보성하면 차밭이 떠오른 까닭은 지자체의 지속적 홍보 노력의 산물이겠지만 무엇보다, 젊은층의 시각적 취향,영화,광고 이미지 극대화에 촛점을 맞춘 여행사,여행작가,TV 등의 자극적,감각적 트렌드가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다.

더구나,최근 국적불명의 웰빙 문화로 인해 보성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을지 모르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길 없다. 섬진강을 자연적 경계로 남성적인 남원의 동편제에 비해, 여성적이며 애절한 서편제의 안태 고향인 예향 보성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관광지 보성으로만 남지 않을까? 라는 우려는 나만의 오버센스일까? 여기서 서편제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식견도 없지만 우리회원들 만이라도 여행이라는 감각적 청량음료 맛보다는, 미련스럽고 질박할지라도 숭늉맛의 답사를 즐겨보라는 것이다.

반석리 석불 이정표를 흘리고 지나쳐 가리지널 모정이 보이자 유현이 지나온 것 같다며 말고삐를 조아 내가 참으로 싫어하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모정의 이름이 여의정 이란다. 원래 한문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냥 如意로 해석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는 정자이니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단청 소코문양이 여의문이며,또한 효자손으로도 칭한다.) 여의 모정에서 원하는 바는 오뉴월 땡볕에서 일을 마친 후 고봉으로 보리밥 한 술 떠고 한숨 늘어 지게 잠자는 농부의 원(願)임에 분명하리라.

그럼 내가 왜 가리지널 모정(茅亭)이라고 표현 했을까?
오래전 처음으로 전라도 특히 남도를 들렸을 때 들판에 펼쳐진 풀집(그때는 모정이라는 단어도 몰랐었고,물론 기와지붕도 있었다,모정이라는 단어는 94년(?)경 주강현 교수의 책에서 알게되었다)이 그렇게 이채로울 수가 없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없는  모정이 그냥 쉼터로만 알았었는데
경상도의 정자 문화, 양반문화와 뚜렷히 대비되는 기층민의 문화로 인식한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 스레트,기와, 더구나 화려한 팔작지붕 까지 갖추어졌으니 가리지널 아닌가? 하지만, 그런 나의 시각은 스쳐가면서 즐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사람의 편리성과,활용가치를 간과한 사치라는 것도  잘 안다.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茅亭에 관해 잠시 짧은 지식을 언급해 보면...

경상도의 정자는 마을에서 떨어진 산수 경관이 좋은 장소에서 이른바 풍류라는 명분으로 기생 옆에 끼고 음풍농월하며 한잔 술에 취해 시조나 읊던,개인 소유의 양반 문화이기에 경상도의 문화는 양반과 기층민의 문화가 단절되었고 전라도에서는 볼 수 없는 탈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물론,선비정신이 구현되고,강학의 공간,시문학의 배태 등의 순기능도 없지는 않지만 여성과 기층민중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남성들만의 공간이었고,집안,문벌의 자기과시욕구가 지나쳐 민중의 손가락 질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전라도의 모정은 들판에, 마을 어구 정자나무 아래에 위치해 마을공동민의 소유이며 농민문화의 공간이고,밤낮 없이 자유롭게 회합이 가능한 문화의 태생지,시연지,놀이 공간이다. 경상도의 정자가 호화스런 재료로 단장한 반면, 모정은 들판에서,강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짚,갈대등 주변에 흔한 재료로 만들지만 일망무제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농부들에게는 오늘날 에어컨 보다 더 청량감을 안겨주는 공간이었으며,지친 몸을 잠시 눕힐 수 있는 수면실 이기도했다.

담양을 제외하고는 잘 볼 수 없는 영남의 정자와, 경상도,충청도에서는 유례가 없는 모정이 산지,넓은 평지라는 자연적 환경의 영향도 분명 있겠지만, 그로인한 문화적 차이도 재미있다. 경상도의 문화가 계획적인 이벤트 였다면, 자연스럽게, 흥에 겨워 시작되는 것이 모정 문화이기에,경상도의 계층별 이질문화가 발달한 반면, 남도에서는 누구나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 문화, 모두가 소리꾼 자질이 있는 토양이 형성되었고, 오늘날도 풍물,판소리하면 남도가 떠오른 것이다.

아무튼, 새마을 운동에 밀려 죽음을 당했던 우리의 문화가 원형질을 갖추지 못할 망정 복원된다는 것은 너무도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 보지 못했는가? 아파트 놀이터, 노인정 등에 사모,육모 지붕으로 복원된 모정의 흔적들을...

지나가는 할머니 두분에게 미륵부처님을 찾으니 바로 답이 나온다.

그 분들에게, 석조 여래 좌상, 비로자나 부처, 등의 학술용어를 붙였다가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돌아올 답을 이제는 알기에, 할머니에게는 모든 부처는 미륵불인 것이다. 인근의 동리에서도 미륵댕이 부처라 불리우고 있으니, 뼈빠지게 농사를 지으도 수탈당하고 가난한 농투성이로 평생을 살아가는 농부들 입장에서야 미륵하생을 염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좌대를 잃어버리고서도 멀리 들녘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수백년 지켜본 탓인지, 눈이 많이 멸실되었으며, 못생긴 코에 비해 화려한 두광이 인상적이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수인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내 입가에서는 웃음이 나오더라.


무릎 아래로 오른 손등과, 왼 손바닥을 한방향으로 표현한 모습 그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이 들판 모정에 모여 앉아 여흥을 즐길때 어깨를  들썩거리며 움직이는 손동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참한 아가씨의 젖무덤 같은 모습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오동사지 오층탑은 간만에 찾아온 사람을 반긴 듯 하다.
옥개석 받침이 4,5층에는 4개, 1~3층에는 5개이고, 1층 몸돌이 위의 몸돌에 비해 너무 크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 백제계열의 날렵한 고려탑이지만 왜? 기단 한면에만 지장보살을 돋을새김하였을까?


오동사 사찰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팔공산 동화산, 동리산 태안사 처럼 분명 봉황이 둥지를 틀고 먹이인 대나무가 울창했던 잘 나가던 시절에는 님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텐데...

2005.03.21

 

 

옛글의 표현이 잼있다.

"좌대를 잃어버리고서도 멀리 들녘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수백년 지켜본 탓인지, 눈이 많이 멸실되었으며, 못생긴 코에 비해 화려한 두광이 인상적이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수인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내 입가에서는 웃음이 나오더라.


무릎 아래로 오른 손등과, 왼 손바닥을 한방향으로 표현한 모습 그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이 들판 모정에 모여 앉아 여흥을 즐길때 어깨를  들썩거리며 움직이는 손동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참!

반석리 부처님도  육계가 높고 삼도를 간략하게 이도만 새겼다.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아니 조선시대까지

보성.장흥 지역 장인계열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반증일까?

 

 

 

 

 

 

석탑부재

석불 배례석으로 놓인 석탑부재

 

 

부연을 새긴 상층기단 갑석

2매로 결구된 갑석의 1매, 또는 1매석을 2등분 하였는지 불분명하다.

상부에는 방형 사리공이 남아 있어 갑석 상부에 사리를 봉안하였음을 암시한다.

 

 

아래 부재는 탑신석

탑신에 비해 우주가 넓게 모각된 모습이다.

 

 

사리공이 보인다.

 

 

예전에도

배례석이 석탑 부재였나?

 

201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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