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서 어서각 崔奎瑞 御書閣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御書)를 하사(下賜)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御書)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현재 어서각(御書閣)에는 영조의 어서, 충정공(忠貞公)의 위패(位牌), 영정(影幀), 비망기(備忘記) 등을 봉안(奉安)해 놓았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최규서 (1650 ∼ 1735)
"경종2년(1722) 12월, 소론의 영수로 떠올라 노론4대신을 내치는데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힘을 합했던 최규서가, 조태구의 후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고려때 해동공자로 명성이 높던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본관이 해주, 세종의 한글창제를 극구 반대했던 청백리 최만리(崔萬理)의 9대손이며, 선조때 시인으로 대문장가였던 최경창(崔慶昌)의 현손, 아버지는 현감 최석유(崔碩儒),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영조11년 정월, 향년 86의 최규서가 숨을 모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슬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천수를 다하고 이승을 떠나는데, 혹 임금께서 국장(國葬)이나 능(陵)을 명하시거든 굳이 사양하라! 장례는 검소하게 치루어 자손들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라!” 과연 최규서가 세상을 떴다는 전갈을 접한 영조는, 국장을 치를 것과 봉능(奉陵)을 명하였다. 이에 자녀들이 기어이 고인의 유언을 지키고자 사양하니, 사람들은 “최정승은 죽어서도 청백리요 백세(百世)의 사장(師長)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충정공(忠貞公)으로 시호가 내려져 뒤에 영조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경기도 안성 원곡면 지문리에 최규서의 묘소가있고, 그의 유품과 어서, 위패 등을 보관한 어서각이 안성군으로 옮겨져 향토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최규서는 사직을 위해서는 강직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정적을 탓하는데는 사감(私感)에 지우치지 않고 너그러워, 당파의 중심에 섰다가 권력을 빼앗긴 뒤에도 정적들이 그를 모질게 탓하지 않아 무사하였다.
일사부정(一絲扶鼎).영조 어필 지조와 신의가 하나 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의미라고 한다.
탑신석. 어서각 앞 위치. 석탑 탑신석으로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용인 어비리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하마석 노둣돌의 잘못된 표현이다.
그나저나 탑신석을 노둣돌로 사용했다니.
상부와 우측면 홈은 무엇인지.
용인 동도사 삼층석탑 어비리사지에 있었던 탑으로 1963년 이동저수지 공사로 인해 옮겨왔다.
아래 사진 동도사 삼층석탑 초층 탑신석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어서각 석탑 탑신석이 본래 부재이고 동도사 초층탑신석이 후보몰인지.
용인 동도사. 어비리사지 삼층석탑 초층 탑신
어석각 팁신석 정보를 나누어 준 이계재(시나브로)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07.20 -.어석각 내용은 다음백과를 참조했습니다 -.다음백과에는 간재집艮齋集을 민재집民齋集으로 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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