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성시

안성...청룡사 사적비.삼층석탑.부도전

임병기(선과) 2018. 7. 2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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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1일 청룡사 글이  있다.

 

바우덕이

-이경화-

바우덕이 바우덕이
바우덕이 찾아
불당골 들어 왔더니
바우덕이는 아니보이고
개울물만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흐르더이다

스무 해 갓 넘긴 꼭두쇠 바우덕이
먼발치에서만 그리다
병들어 비로소
비로소 내사랑
어허둥둥 병수발 즐거워라

천하의 바우덕이
바우덕이 찌렁찌렁 쇳소리도 삭아져
그래도 내 사랑 바우덕이
마침내 내 님이시여
스물 세 해 겨울 끝내 못 넘겨
불당골 풍각쟁이 노래 그치니

생전에 기구했던 팔자 씻을지라
무덤일망정 흐르는 물 가에 쓰니
이놈의 팔자
재 넘으니 따라오고
물 건너니 따라오누나
그예 잊지 못 하고
흐르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씻고
그리움 씻어 내고 씻어 내도

이적지 떠나지 못해
나직한 한숨 되어
조용히 불당골에 남아 있더라

이경화는,

바우덕이 바우덕이
바우덕이 찾아
불당골 들어 왔더니
바우덕이는 아니보이고
개울물만 얼음장 밑으로 흐르더이다
그리움만 졸졸졸 낮게 흐르더이다

뭇사내를 휘어잡으며 사당패를 이끌던 바우덕이가 병들자 끝까지 바우덕이를 병수발 하였다는 이경화의 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머리속에는 바우덕이가 장길산의 묘옥의 캐릭터로 떠오르고 이경화도 이경순으로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청룡사 가는 길에 만난 바우덕이의 묘 앞에서 비속비승의 예인집단인 사당(寺黨)패가 생각났지만 안성 땅이 왜 미륵 하생을 꿈꾸며 일어난 임꺽정의 무대 칠장사와,장길산의 무대 청룡사가 있으며 유난히 미륵돌부처가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을 몰라 애닯다.
근거없이 유추해 보면 역사적으로 지역적 배경도 없겠냐마만은, 살아가는 이생에서 한번 쯤 큰소리 치며 그들 민중을 대변했던 임꺽정, 장길산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그들이 바로 미륵이 아니었겠는가?

찬바람이 매몰찬 개울가 양지녘에 누워 있는 남사당 바우덕이 묘 앞 비석에 새겨진 싯구를 더듬으면서 청룡사로 향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정월 초하룻날부터 이렇게 추울 수가 있을까?
모처럼 아들놈과 단둘이서 나선 길인데 날씨가 따뜻하다면 작가 이순원이 아들과 대관령을 넘어 고향 강릉으로 가면서 주고 받은 대화를 흉내내며 진솔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보련만...

서운산 청룡사,청룡저수지...
남사당의 삶이 흥건히 배여있는 절집이지만,사찰 이름으로 봐서는 당당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초기 불교의 도입시에는 대부분 용이 악룡으로 나타나며 불법으로 물리친다는 설화가 지배적이지만 상서로운산, 청룡 등이 등장한 것은 민간신앙보다 불법이 우위에 섰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물론 나만의 설이다)

자신만만하게 자리한 사적비와 옹기종기 정겨운 부도전을 지나 대가집 솟을 문 같은 천왕문을 통과하면 정갈하고 깔끔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작은 전각들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청룡사 대웅전의 굽은 소나무 기둥이 눈앞에 있건만 어떤 느낌도 전해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름다움도 지나쳐서 일까?
뭇사람들이 찬사를 보낸 부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내구력은 뛰어나지만,기술적으로 어려운 가구 수법이라는데 도편수는 의도적으로 선택을 했을까?
목재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치목의 수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편수의 정성과 염원이 가득한 혼이 담긴 전각이며,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르 거쳐 터득한 기량의 결정체임은 이미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나의 글은 사족에 불과하겠지만,오늘날 산허리를 자르고 땅을 마구잡이로 파해쳐 건물을 올리는 우리들을 청룡사 대웅전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으니...

대웅전에 몰입해서 스쳐 지날뻔한 상처를 머금은, 그냥 주머니에 담고 싶은 3층 탑을 뒤로 하고 나서는 길에 남사당패의 질펀한 노랫소리가 들린 듯하여 몇번이나 고개를 돌려 보았건만 서운산을 타고 내려오는 산바람만 볼을 스치더라.

2005.01.01

 

이후에도 다녀왔으나 사진 한 장 없다.

 

 

조선국 경기도안성 서운산 청룡사 중수사적비(朝鮮國京畿道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

 

직방형비좌.비신.옥개석으로 구성되었다.

비명과 서문은 동현거사(洞玄居士)나준(羅浚)이 짓고, 전 직산현감 황하민(黃夏民)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사헌부 지평 김진상(金鎭商)이 썼다.

 

비 서문

고려 말기 지정 연간(至正年間 : 1341∼1367)에 나옹(懶翁)이 중창한 사실과 1720년(숙종 46)에 도인(道人)이 중수한 내용 등 연혁을 차례로 서술하고, 덧붙여서 세조가 토지와 절의 기물(器物)을 하사한 일,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원당(願堂)으로 삼고 절을 보호한 일 등을 적었다.

 

비명

서문과 대동소이하며 맨 끝에 “서방정토에 들어가는 사람은 공(空)과 유(有)를 분별치 않으나, 오로지 비석을 공문(空門) 앞에 세워 후세에게 공렬(功烈)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비석을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는 점이 다르다.

 

비명 끝에는 ‘英烈殿下卽位之四十七年庚子七月日立(영렬전하 즉위지47년 경자7월일입)’이라고 건립 시기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1720년(숙종 46)을 가리킨다.

 

비 후면

서문을 쓰고 이어서 산중대덕(山中大德)과 시주의 방명록을 기록하였다. 서문에서는 청룡사의 연혁을 간략히 정리하였는데, 원나라 세조 지원연간[至元年間 : 1264∼1294]에 대장암(大藏庵)으로 창건되었고 지정 연간에 중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방명록의 체재를 보면 노덕질(老德秩)·불량답시주질(佛粮畓施主秩)·철물대시주(鐵物大施主)·연화질(緣化秩)로 되어 있다.

노덕질에는 산중대덕과 지전(持殿)·지사(持寺)·삼강(三綱)·주지(住持)·화사(化士) 등의 직책을 가진 승려 13명이 기록되어 있고, 불량답시주질에는 승속(僧俗)을 합하여 64명, 철물대시주에는 승속을 합하여 17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연화질에는 석수·편수·각공·각수·조역 등이 8명, 공양주가 4명 합하여 12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명록은 1720년을 전후한 청룡사의 중수 불사에 참여하였던 승려와 일반 불자의 명단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8세기 초의 불교사원 건축공사의 성격을 살피는 데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청룡사 삼층석탑

은적암지 부도 답사후 들렸으나 대웅전 보수 공사중

사인비구동종,탱화 소조삼존불 등은 다시 뵙지 못하였다.

 

2층기단의 삼층석탑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전층 4단, 절수구가 표현되었고,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상부에는 1단 각형 탑신괴임을 조출하였다.

상륜은 망실되었다.

 

고려 전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부

하층기단 갑석 이하는 결실

상부에 각호각 괴임이 있으며 내림마루를 표현하였다.

 

상층기단 면석은 탱주 1주, 야우주를 모각하엿다.

4매를 혼합식으로 결구 하였으며 갑석은 하부에 부연을 새겻고 하층기단 갑석과 동일하다.

 

 

하층기단 면석 부재

탑 옆에 탱주 1주가 모각된 2면이 놓여 있다.

대웅전 보수와 더불어 복원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자료에 단층기단으로 소개하고 있어 안타깝다.

 

 

청룡사 부도전

입구 사적비 향우측에 위치.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가 모셔져 있다.

 

 

방형대석위에 종형 탑신

탑신과 일석인 상부에는 삿갓 모양의 보주를 올렸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당호가 없다

탑신과 일석인 보주를 낮게 표현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방형 지대석,

육각형 하대석, 부등변팔각형 중석,석탑 옥개석 형의 상대석. 원구형 탑신. 옥개석.상륜부

석탑 옥개석 모습의 상대석은 본래 부재가 아닐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탑신과 상륜

 

 

 

설봉당대사 관성 雪峰堂大師 寬性

팔각대좌,종형 탑신 하부에는 팔엽의 앙련을 새겼고

연주형 받침, 상부에는 연주형 받침 위에 앙련를 표현한 보주를 일석으로 올렸다,

 

설봉당

칠장사 해월당경율대사비문에 등장하는 설봉당스님을 주인공으로 추정한다.

경율대사(1693~1780)17세에 송계당 여정과, 설붕당 관성에게 수계를 받았다

설봉대사는 서산대사 법손으로 정원의 4대손이며, 계룡산 홍파당 문인이라고 한다.

설봉당은 18세기 중반 이전에 입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별한 조식이 없다.

당호를 남기지 않았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석종형 부도, 방형대좌. 상부에는 원형 보주받침 위에 연봉형 보주를 올렸다.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보주에 복련을 새겼다.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탑신상부에 복련을 표현하였으며, 1단 받침위에 보주를 올렷다.

 

 

팔각대좌

면석에 안상을 새겼으며, 갑석에는 복련을 새겼다.

상부에 원형 괴임위에 상륜을 올렸다.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모련당대사 상민 妙蓮堂大師 尙敏

팔각대좌 종형탑신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

탑신 상부에 복련, 1단 받침위에 보주를 올렸다.

 

모련당대사 상민

천안 광덕사 희옥대사 비문에 등장하는 스님으로 추정.

 

희옥대사(1603~1671)의 제자로 희옥대사가 입적하자 다비식을 주도하고 부도비를 세웠다.

모련당은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에 입적한 대사로 추정한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종형 부도로 보주와 탑신이 일석으며, 2단 둥근 받침위에 보주를 올렸다.

 

 

비석

4명의 당호를 새긴 비석으로 부도전에 그 주인공의 부도가 있을 것이다.

 

취암당대사 천담 翠巖堂大師 天湛

운파당 雲波堂

계월당대사 桂月堂大師 處機(?)

비륜0 萉輪0(?)

 

 

은적암지 부도 1기

은적암

청룡사 대웅전

 

다시 들릴 기회가 있으려나...

 

201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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